이 땅에 과학이 있는가?
 
최근 한 과학잡지의 기자와 만났을 때 기자는 지나가는 말로 “교수님의 자제분들을 과학자로 키우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을 때 요즘 고등학생들의 자연계 기피 현상에 대한 농담이 하나 있다고 했다.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부인이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하면 “자꾸 그러시면 아빠처럼 될 거예요”라고 한단다.
 
언론에서 요즘 기초과학 기피 현상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십 여년 전에는 고등학교 자연계열 학생수가 3분의2 정도이던 것이 작년에는 4분의1 수준으로 떨어져 있고, 그나마 소위 인기가 있다는 정보기술 등에 치중돼 있다. 그러나 산업계에서는 정보기술에 필요한 어느 수준 이상의 인력은 구하기 어렵다고 불평하고 있다. 한편 삼성전자의 회사 가치는 일본의 소니 회사를 앞지르며, 액정화면 기술은 세계 최고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술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러한 경향을 바로 잡기 위해 정부에서나 대학 혹은 교우들이 이공계열 진학을 장려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장학금을 주거나, 병역혜택을 주면서 이공계열 진학을 장려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사고방식이며, 이러한 단편적인 사탕발림으로 많은 학생들이 자연계열을 희망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유치한 발상이다.
 
현재 상황을 살펴보자. 우리나라 회사에서 이사 이상의 중역 중 자연계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공무원 중 차관급 이상의 고위 공무원 중 과학의 배경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극단적으로 냉소적인 입장에서 보자. 최근 이권이 관련된 수많은 게이트 중에서 기초과학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 관련된 사건이 얼마나 되는가? 이에 대한 모든 대답은 매우 적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배경이 있는 사람들은 세 번째 경우는 제외하더라도 사회에서 적당한 존경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사회성이 없다”, “공부나 하지 왜 나서려고 하느냐”는 것이 기초과학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대표적인 편견과 비하의 표현들이다. 사회성이 없기로는 전공을 막론하고, 고독하게 연구해야 하는 많은 교수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며, 진정 공부나 해야할 사람들은 과학 하는 사람말고도 많이 있다. 기초과학적 배경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없으면 누가 자식들에게, 동생들에게, 후배들에게 존경받지 못할 분야를 선택하라고 권하겠는가?
 
한편 기초과학 혹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 요구하는 덕목들은 젊은이들의 문화적 특징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기초과학에서는 오랜 시간의 집중력, 어려운 문제가 닥쳐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내력, 경제적인 편안함에 앞서는 지적 욕구 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수 십 초마다 바뀌는 TV 화면, 클릭 한 번으로 필요한 정보를 피상적이게나마 얻을 수 있는 인터넷에 익숙해지고, 고등학교 때까지 스스로 이해하고 훈련할 시간 없이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학원 등지에서 주입된 지식만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일들은 매우 어리석고 따분한 일이 되고 말았다.
 
기초과학을 장려한다는 것이 모든 국민을 과학자로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기초과학의 근간은 합리적인 사고방식, 즉 문제가 닥쳤을 때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반적인 방법론에 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꽉 막힌 사람, 원리원칙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불행한 현실일 뿐이다. 부모나 누나나 선배의 입장에서 과연 기초과학이 무엇인지, 과연 중요하기나 한지, 정말 현대문명의 기초로 누구나 가져야할 사고방식인지를 자식에게, 동생에게, 후배에게 이야기할 사람이 있는가?  본교에서 이공계를 육성하자고 하면 들을 사람이 있겠는가?
 
문제는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에 있다. 너무 원론적인 말이지만, 기초과학의 중요성이 학교의 운영진 뿐만 아니라 교수,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틀로 자리잡혀야만, 이공계의 육성방안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론적인 수준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현재의 상황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최준곤(이과대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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