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돼지를 누가 좋아하겠어.

-아니야, 제이. 너 그렇게 살찐 편 아니야. 약간 통통한 편?

-그거 참 진부한 위로 멘트네. 통통한 편이라니. 175cm90킬로그램이 통통한 편이라 생각 해? 나도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혹시 선사시대 기준 아니야?

-아니, 병신아. 그럼 살을 빼. 살은 뺄 수라도 있지. 키는 안 그러잖아.

-역시, 너도 본심이 나오는 구나.

-그놈의 피해의식.

 

  상대의 신체적 특징을 비난하는 건 사회에서 그리 권장되는 행위는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말해봤자 그냥 기분 나쁘니까. 아니면 바꿀 수 없는 걸 탓하는 건 옳지 않으니까 정도다. 내 생각은 다르다.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의 기준. 그 기준은 도대체 누가 정하는 걸까. 살아가며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것과 어찌할 수 없는 것의 경계가 정해져 있는 걸까. 어려운 문제다. , 몸무게, 재산, 학벌, 성격 등은 어떻게 보면 개인이 컨트롤 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흔해빠진 허무주의를 말하는 걸로 들릴 수도 있겠다. 자매품으로 노력의 가치를 부정함, 자유의지의 중요성, 인간의 존엄성 같은 게 있다. 사람들에게 이런 걸 들을 때면 환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 그러시군요, 하는 친절한 리액션과 함께. 차라리 돈이 최고지 다른 말아니고 정말로 돈이 최고야, 하는 사람이 내게는 더 솔직해 보인다.

  제이는 후자였다. 그는 운명론을 믿으며 살아갔다. 이런 모습이 꽤나 신선하게 보였다. 나는 전자였으니까. 노력만 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정도는 아니었지만 세상이 아무리 뭣 같더라도 한번 해보자! 정도는 됐다. 덕분에 어른들은 날 좋아했지만 친구들은 날 재수 없게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는가. 운명에 맡기는 태도 따위 곧 죽어가는 할배들이나 택할 태도다.

  내 방식이 옳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한 가지 예시. 2009년의 우승팀은 기아 타이거즈였다. 사람들은 나지완의 한국시리즈 7차전 연장 끝내기 홈런은 기억하겠지만 당시 6,7위 팀은 기억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나와 제이는 딱 그 정도였다. 우승과는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밑바닥은 아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그런 위치. 설령 우리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다 한들 이런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TV에서 국밥을 맛있게 말아 드셨던 분이 대통령일 때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외치는 개그맨을 보며 사람들이 웃었다. 지금은 어떨까. 사람들은 이제는 그 말을 들으면 불쾌해할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앞서 말했다시피 제이는 통통한 몸이 콤플렉스였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괜찮다, 괜찮다 해도 전혀 듣지를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태도는 그의 연애사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업이란 파는 것이니까. 자신이 팔 제품에 믿음이 없다면 누가 그걸 사주겠는가.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제이에게 IMF같은 사건이 터졌다. 그가 가망 없는 상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흔한 일이다. 중요한 건, 이 흔한 일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다. 여기서 디테일이 결정된다. 좋은 방법은 남들이 그러하듯이 뻔하게 해결하는 것이다. 갑작스레 고백하고, 당연하게 차이고. 슬퍼하며 친구들을 부르고, 정신없이 술집에서 취하고. 잊지 못할 일들을 저지르다 의미 없는 후회를 시작한다. 이런 순서를 밟다 보면 시작이 어디였는지를 자연스레 까먹게 되는 것이다.

  제이는 일을 어렵게 풀어갔다. 그에게는 술 먹고 고백할 용기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그는 자그마치 5년이나 끌어갔다. 강산이 하여튼 바뀌었을 시간에도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실수. 잘못 말했다. 변하기는 했다. 더 안 좋은 쪽으로. 호감이 깊어져 집착이 되고 그 집착은 자연스럽게 자기혐오를 낳았다. 덕분에 긴 시간 동안 그의 찡찡거림을 견뎠다. 제이는 느닷없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 날 자주 귀찮게 했다. 이런 식이었다.

 

-, 나 왜 이리 병신 같지.

-원래 그랬어. 걱정하지 마.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을 수 있어?

-있지.

-너 걔가 남자친구 만나고 있으면 전화할 수 있어? 연락할 수 있어?

-있어.

-좆까.

-진상 새끼.

-내가 좆같아?

 

  군대 문제로 자취방을 빼고 잠시 제이의 자취방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거기서 데이지를 처음 만났다. 기묘한 만남이었다. 동아리 사람들과 칼국수에 막걸리를 마시고 제기동에서 제이가 있는 청량리까지 걸어간 날이었다. 많이 마신 탓에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제이의 자취방 문을 열었다. 웬 여자애가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랐다. 환영이 보일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몇 번의 도리도리를 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수도승 생활을 마무리 하는 친구의 역사적인 순간을 방해할 수는 없지 않는가.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아 집을 나왔지만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시간이 필요해 출입구 앞에서 담배를 한 대 물고, 오늘은 어디서 잠을 자야할지 고민했다. 담뱃불과 필터가 닿을까 말까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에 제이가 나타났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친구. 방해해서.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그럼 과방에서 잤을 텐데.

-, 무슨 개소리야. 그런 사이 아니니까 그냥 너도 와서 자라.

-진짜 그래도 됨?

-우선 근데 코인노래방 좀 갔다 오자.

 

  노래방에 갔다 온 뒤 문을 다시 열자 데이지가 보였다. 자기 집이라도 된다는 듯이 침대에 떡하니 누워있었다. 이런 상황이 민망해서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피곤한 나에게 그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대로 바닥에 누워 나또한 잠에 빠져들었다. 대충 밤을 보내고 싶었지만 갈증을 못 이기고 눈꺼풀이 떠졌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자 데이지는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맨다리를 보고, 괜히 무슨 죄를 저지르는 것 같아 얼른 밖으로 나갔다. 제이도 뒤척이는 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날 따라왔다. 남겨진 데이지는 마찬가지로 자는 척을 했거나 자고 있었다. 우리는 근처 편의점에서 육개장 사발면을 먹고 헤어졌다. 그대로 난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본가로 내려갔다.

  입대하기 한 달 전,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숙소는 당연히 제이의 자취방이었다. 목적은 간단했다. 군대 가기 전에 서울에서 집 들어갈 걱정 없이 친구들과 원 없이 마셔보자는 거였다. 하루는 동아리 사람들. 다른 하루는과 사람들. 또 다른 하루는 그냥 친구들. 이렇게 무한 루프를 돌았다. 이러는 와중에도 저번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면 곤란하니 제이의 방에 들어가기 전 항상 그에게 전화를 먼저 걸었다.

  점점 지칠 때쯤 제이에게 전화를 하자 그는 나보고 근처 술집으로 오라고 했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면서. 술이 술을 부르는 건 당연하니 그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술집에서 데이지와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 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이 지점에선 역시 얼평이 빠지면 안 된다. 예뻤다. 충분하지 않는가? 제이 같은 놈이 어떻게 이런 애와 알고 지내는지 괘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적당한 탐색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녀가 나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임을 직감했다. 초면에도 사사건건 쓸데없는 일로 그녀와 말씨름을 하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에 일어나면 기억도 안 날 그런 이야기였다. 여우와 신포도와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화풀이 할 대상이 필요했는지도. 사람은 타인에게서 자신의 결점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한다. 한 성장 소설에 나온 글귀였다. 데이지도 비슷한 걸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

 

-, 니들 근데 무슨 관계냐. 남녀 둘이 방안에 함께 있으면 누가 봐도 의심한다고. 데이지에게 물었다.

-넌 애가 남자로 보이냐? 하긴 둘이 기숙사 생활했으니까. 그거 봤긴 봤겠네. 그치만 그건 객관적인 거고 나에겐 얘 남자도 아니야.

-데이지, 너 경고하는데 선빵 날리지 마. 내가 먼저 할 말이었다고. 나도 너 여자로 생각 안 해. 제이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잘 됐네. 그럼 앞으로도 제이 게스트하우스 많이 들릴 거니까 수고 많이 해줘. 알았지?

-다음에는 입장료 받는다.

-어머, 우리 사이에 무슨 소리? 그럼 너 나한테 소개팅 주선비 내놔.

제이가 안절부절못하고 대답했다.

-데이지, 청소 열심히 해놓을게.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진작 그럴 것이지. , 누나한테 잘해라. 그래야 앞으로 누구 소개시켜 줄 거 아니야.

 

  둘은 꽤나 재미있는 콤비였다. 아쉬운 건 곧 군대에 가야돼서 그들을 지켜보지 못 한다는 사실이었다. 둘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둘이 어떤 관계이든, 데이지가 제이를 어떻게 생각하든 둘이 함께 있다는 게 부러웠다. 루킹 삼진으로 끝나는 것보다는 병살타라도 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날 괴롭혔다.

  그때 난 곡 작업을 하고 있었다. 8살에 사촌형 아이리버에서 다이나믹 듀오의 <Ring my bell>을 들은 이후부터 난 힙합이었다. 사회에 뭐라도 남기고 군대에 가고 싶었다. 작업을 하는 동기가 순수했다고는 말 못하겠다. 전하지 못한 말을 랩으로 포장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집에는 민망해서 그냥 술 먹으러 간다고 말해 놓긴 했지만 서울에 온 목적은 이렇게 따로 있었다. 같이 동아리 활동을 했던 선배의 작업실을 빌려 곡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비트도 완성되고 가사도 다 적어놓았지만 집에서 녹음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찌어찌 녹음은 겨우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결과물이 성에 차지 않는 게 문제였다.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느껴졌다. 지금 하고 있는 걸 아무리 예술 같은 걸로 포장한다 한들, 그저 질척거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페이스북에 그 파일을 올리지 않고 그대로 군대에 들어갔다. 잘한 일이었다. 그녀가 그걸 들어준다 한들 바뀌는 건 없었다.

  내가 입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도 곧 입대했다. 그는 특이하게 군복무 중 해외파병을 갔다 왔다. 일반 사병으로는 힘든 일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에게 상황이 딱딱 맞아 돌아갔던 것이다. 운전병이었던 제이는 레바논 동명 부대의 존재를 알게 돼 생각 없이 그곳에 지원했다고 한다. 운전도 못하는 자신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대 생활이 쉽지 않아 그냥 어디라도 도망치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덜컥 붙어버린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나보다 아니, 제이보다 훨씬 놀라워했다. 제이가 해외파병이라니. 우리 제이가 파병이라니. 아직 태양의 후예 송중기의 잔상이 남아 있을 때라 그랬을 것이다. 제이와 특전사의 모습은 도무지 겹쳐지지 않았다. 사실 그런 건 전혀 상관없었다. 제이는 총 잡을 일이 전혀 없는 운전병이었다.

  제이의 말로는 죽을 고비를 레바논에서 몇 번 넘기고 나서. (내 생각에는 제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가 아니라 그의 운전 실력이었겠지만) 그는 파병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 파병 위로 휴가를 즐길 때, 난 마지막 휴가 중이었다. 마지막 휴가 쯤 되니 술 마시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도 지겨워져 집에서 뒹굴거리고만 있었다. 제이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그리웠다. 그의 파병 썰도 듣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제이는 지금 잠시 서울에서 대학 친구들 만나고 곧 날 보러 온다고 했다. 중간에 잠시 부산을 들렸다가 온다는 게 함정이었다. 왜 부산을 가냐고 그에게 묻자 제이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데이지를 보러 간다는 것이었다.

  둘이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뭐 400km를 달려 부산까지 가냐고 제이를 힐난했다. 제이가 말하기를 겸사겸사 가는 것이라 했다. 부산에 한 번도 놀러간 적이 없어서 좀 궁금하다면서.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으니 해운대에서 예쁜 누나들을 꼬셔오겠다는 말도 잊지 않고 남겼다. 그 말을 듣고 우습기도 해서 뾰족한 장난기를 발동했다.

 

-제이, 파병까지 같다왔는데 걔 보러 갈 거면 선물이라도 사가지고 가. 목걸이 어때? 돈도 많이 벌었을 거 아니야. 친한 친구인데 그 정도 해줄 수 있지 않아?

-아 오바지. 친구끼리 오글거리게 무슨 목걸이냐.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목걸이 딱 던지면서. 레바논 갔다 오는 길에 주웠다. 이런 멘트. 얼마나 좋아. 한번 마음도 떠보고. 혹시 몰라 얻어 걸릴지?

-무슨 소리야. 나 걔 안 좋아한다니까.

 

  멍청한 놈. 너만 빼고 주변 사람들이 제이가 데이지를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을 걸, 친구야? 통화를 마치고 걱정했다. 그냥 심심해서 던져 본건데 설마 진짜로 사가지는 않겠지. 한국에 남아 있는 아내에게도 선물을 안 사가지고 가는 아재들이 태반일건데. 제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부산 가면서 선물을 사가지고 갔다고 한다. 목걸이는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팔찌를 사갔다고 한다. 그게 그거 아닌가. 목에 걸거나 손목에 거는 것의 차이인데 그게 얼마나 다르다고. 곧 만날 제이의 후일담이 기다려졌다. 결국엔 제이의 배신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가 약속을 어기는 건 이미 겪을 대로 겪어 놀랍지도 않았다.

  지긋지긋한 군 생활을 마치고 제이에게 연락을 하자 그는 아직도 위로 휴가 중이라고 했다. , 파병 참 좋구나. 굳이 장관 아들이 아니어도 휴가 길게 받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선물은 줬냐?

-아니, 가서 만났는데 걔가 남친 생겼다고 해서. 다시 가지고 집에 갔다.

-병신. 그래서 그 팔찌는 어떻게 했어. 에휴, 불효자식. 어머니한테 선물도 안하는 놈이 여자한테 정신 팔려서 그랬다 하면, 아마 너희 어머니 뒷목 잡고 쓰러지실 거야.

-조용히 해라. 팔찌? 그거 그냥 과 동기한테 중고로 팔았다.

-......

 

  그걸 또 팔았다니. 제이는 좀 잡을 수 없는 친구였다. 부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제이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고속버스를 타는 느낌은 어떨까. 설마 슬픈 노래를 듣지는 않았겠지. 거기에 술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발라드를 들었다면 그건 평생 흑역사였다. 그 기분이 무엇일지 대충 짐작됐다. 나 같은 경우엔 KTX였다. 스무 살에 제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눈물의 KTX를 탄 적이 있었다. KTX는 분명 자기부상열차라 흔들릴 리가 전혀 없는데 왜 이리 기차가 흔들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열차 탈선해 버려서 모두 다 죽어버려라 하는 속없는 생각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뭐, 엄청 웃긴 일이다. 제이를 위로해주고 싶어 이런 말을 했다.

 

-뭐 러브? 요즘은 돈으로 될 것 같은데? 제이,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건 돈으로 팔수도 있다는 거 아니야? 그냥 팔아버려. 누가 살지는 모르겠지만. 당근마켓에 올려서 싸게싸게 넘기라고. 마르크스가 비슷한 말을 했대.

-약 좀 그만 팔아라. 나 사회학과거든? 그 새끼가 언제 사랑을 말해? 빨갱이가 사랑을 말했다고? 그 새끼는 자본가 타도만 외치는 놈 아니야? 

-아니! 어디서 읽었다니까. 돈이 교환가치가 되면 안 된다고. 우리 크스형은 철지난 물물교환의 시대를 원했나 봐. 교환가치 역할을 하는 돈이 사라지고. 일대일 교환의 시대를 열고 싶었던 거지. 뭐 이런 거 있잖아. 사랑을 얻으려면 사랑을 주어라! 우정을 얻으려면 우정을 주어라! 이런 거.

-그런 말을 누가 못해? 그리고 듣기만 해도 글러 먹었네. 왜 공산주의가 망했는지 알겠어. 지금 나라꼴이 왜 이 모양인지도 알겠고.

-갑자기 나라꼴은 왜 또 나와. 테러 당하고 싶어? 혹시 모르잖아. 나중에 한번 또 뒤집어 질수도 있고.

-, 시끄러. 데이지 안 좋아한다니까. 몇 번을 말해? 소개팅이나 시켜줘. 곧 전역한다.

 

  복학 후 제이는 소개팅을 몇 번 받았다. 뭐 당연히 여자친구를 사귀지는 못했다. 제이가 제이했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미심쩍었던 건 제이가 들려주는 소개팅 후기였다. 자신한테 호감을 먼저 보이는 사람들이 좀 있었고 한 사람은 영화도 같이 보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제이는 교복을 입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모습이 어울렸다. , 내가 변했듯이 제이도 당연히 변했음을 인정했다. 하긴 학교에서 니들이 롤즈의 정의론을 알어? 도스토예프스키를 니들이 읽어 봤어? 하면서 깔끔한 척, 고상한 척을 하던 나도 지금은 이렇게 진창 안을 굴러다니고 있으니까. 힙합 아닌가.

  제이는 소개팅으로도 미련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호구 짓은 계속됐다. 제이에게는 매일 파티를 열만큼은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넘쳐났다. 그는 데이지에게 총 5가지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 서비스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숙박서비스. 데이지가 제이의 집에서 자고 간 건 그날 하루가 아니었다. 가까운 자기 집 나두고 왜 제이의 게스트하우스냐 하고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매일 봉지라면을 먹다보면 가끔씩 컵라면도 먹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닌가.

  다음으로는 배달서비스. 데이지에게는 배달의 민족이 필요하지 않았다. 데이지가 제이를 부리는 방식은 일류였다. 그녀는 공짜로 제이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예를 들어 죽을 사오라고 시킨 뒤 보상으로 젤리를 주는 식이었다. 제이가 힘들여 치킨을 사와도 데이지는 자신의 집으로 고생한 제이를 들이지 않았다. 고생한 친구 다리 하나 정돈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녀가 정말 아픈 건지 아니면 아프고 싶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때가 많은 것도 문제였다.

  충격적인 건 현금서비스였다. 전문용어로는 카드깡. 서울시에서 현금카드를 준 적이 있었다. 데이지는 조건에 해당되어 그 카드를 받았다고 한다. 데이지는 현금카드 말고 현금이 필요하다 했다. 그는 데이지의 현금카드를 받고 자기 돈을 송금했다. “데이지가 학원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거기는 카드를 안 받는다잖아.” 그를 위로해주기 위해 나간 술자리에서 들었던 말이다. 카운터 앞에서 기한 지나기 전에 얼른 써야하지 않겠냐며 제이가 카드를 긁는 모습이 서글펐다. 서울시가 참 좋은 일 한다 싶었다. 죽어가는 소상공인을 살리느라 제이는 죽어갔다.

  과제서비스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생 시절 나보다 키가 20cm 정도 컸던 친구의 학원 숙제를 대신해준 이후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서비스였다. 데이지가 그래도 기프티콘 준다고 그가 해맑게 말하자 나 또한 해맑아졌다. 그래도 대가가 있는 거구나 싶어서. 제이도 분명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 마음대로 이용해보라 하는 그런 마음이었을까.자신은 미친 로맨스 서사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삼류도 못 될 막장드라마였다. 사람이 이용도 좀 하고, 이용을 당해야지. 당하기만 하는 건 너무 평면적이지 않는가. 제이는 전혀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제이는 데이지에게 서비스를 충실히 제공하다 잠시 에러가 걸리면 항상 나를 이용했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재부팅밖에 없었다. 다행이 내 주량이 제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 그를 재부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과정이 좀 귀찮았을 뿐. 제이에게 또 다른 에러가 뜬 날이었다. 그의 자취방으로가 그의 재부팅을 도와주기로 했다. 신라면과 진로 4병을 사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에. 제이는 항상 맥주 타령이었지만, 난 항상 가볍게 무시했다. 그럴거면 지가 사던가. 제이는 얻어먹는 주제에 입맛이 비싼 게 문제였다. 내 말은 그의 많고 많은 문제 중 하나였다는 뜻이다.

  진로를 1병 비우자, 제이는 시작버튼을 이미 누른 것 같았다. 이제 마우스를 조금만 더 옮겨 종료버튼을 누르면 될 것 같았다. 꺼지지 않고 제이가 노래를 불렀다.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이었다. 부모님 세대 가수였다. 아무리 지금 레트로가 유행이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구닥다리였다.

 

다가가면 뒤돌아 뛰어가고 쳐다보면 하늘만 바라보고 내 맘을 모르는지 알면서 그러는지 시간만 자꾸 자꾸 흘러가네. 스쳐가듯 내 곁을 지나가고...

 

  도저히 들어줄 수 없어 중간에 그의 노래를 끊었다. -, 그만해 아재 같아. …… 뛰어 갈 텐데. 훨훨 날아 갈텐데.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아이처럼 뛰어가지 않아도 나비 따라 떠나가지 않아도. 결국 나까지 따라 부르고야 말았다. 옛날 아이리버에 있었던 성시경의 리메이크 버전이 생각나서였다. 노래를 마치고 제이가 주정을 시작했다.

 

-, 조덕배가 소아마비 환자였던 거 알아? 그거 있잖아. 어릴 때 걸리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만드는 병. 그냥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거지. 어린 마음에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그런데 조덕배가 이웃집 누나를 좋아했다네.

-그래서 이런 노래가 나왔다? 어디 나무위키에서 읽은 거 가지고 사실인 양 떠들지 마, 제이. 괜한 감정이입도 하지 말고. 덕배가 하니까 예술이지 우리가 하면 주정이야.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나만 무안해졌다. 깎아내린 건 제이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우리는 다시 진로를 비우기 시작했다. 4병에 이르러 제이의 시작버튼을 넘어 종료버튼을 누르는 것에 성공했다. 불을 끄고 제이의 자취방을 나섰다. 이어폰을 꼽고 신발을 질질 끌었다. 괜히 제이가 생각나 조덕배의 노래를 듣게 되는 것이었다. ‘아이처럼 뛰어가지 않아도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목격했다. 데이지였다. 당연히 옆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모르는 척 고개를 푹 숙이고 사뿐히 지나갔다. 자취방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침대에 누웠다. 아이폰을 확인하니 데이지의 문자가 와있었다.

 

아까 왜 인사 안했어?

그냥. 인사하기 귀찮아서.

미친놈zzzz. 담에 제이랑 같이 보자.

, 넌 제이한테 넌 대체 왜 그러는 거냐?  

 

  데이지는 마지막 문자에 답하지 않았다. 제이와 데이지를 함께 만나기까지 이후 시간이 꽤나 걸렸다. 전국 마스크령 때문이었다.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서 라고는 했지만, 우스웠다. 쓸데없는 짓만 하는 놈들. 지들 아랫도리 관리도 못하면서 국민들 건강은 걱정하구나 싶었다. 덕분에 꽤나 긴 시간동안 집에도 내려가지 않고 난 방 안에 계속 침잠해 있었다. 가끔씩 제이와 연락은 했지만 그를 보지는 못했다. 5평짜리 집이 답답했지만 마스크를 끼는 것이 더 답답했다. 침대에 누워 하나같이 우울한 음악들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참에 2PAC이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게 할 가사를 써보자고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가사를 적어봤자, 다음날에 일어나보면 눈 뜨고는 못 봐줄 그런 가사들뿐이었다.

  마스크령 따윈 무시하고 제이와 데이지를 다시 만난 날, 난 이 문제를 상담했다. 그전까지는 무언가를 위해 가사를 적었지만 지금은 무얼 위해 그랬는지 헷갈린다고. 그 사람을 좋아해서 가사를 적었던 건지, 가사를 적기위해 그 사람을 좋아한 건지. 그냥 이런 게 예술병이 아니냐고.

  둘의 대답은 명쾌했다. 멍청한 소리하지 말고 소맥이나 말라고. 우리도 모르는 걸 말해 무엇 하냐고. 정신이 들었다. 웃음이 나왔다. 힙합인데 발라드나 하고 앉아있었네. 한심한 놈. 괜히 삐뚤어지고 싶었다. 술도 적당히 취했고. 깽판 치는 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짓궂은 장난이 떠올랐다.

 

-, 데이지. 너는 어떻게 된 게 남자가 시즌마다 바뀌냐? SS시즌 남친 사귀다가 시즌오프 끝나면 FW시즌 남친 사귀고. 그러다 보면 또 내년 신상들 들어오고. 니가 뭔데? 제이는 너한테 뭔데?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데이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제이가 끼어들었다. 자기가 뭔데 나서는지.

 

-, 또 너 뭔 소리 하냐. 우리 둘이 친구야. 친구라고. 너야 말로 주제넘게 무슨 참견이냐? 취했어? 나 데이지 안 좋아해. 너는 좋아하는 여자애 아무렇지 않게 집에 재울 수 있어? 데이지 나한테 남자야. 남자라고.

 

  거짓말. 데이지를 처음 만난 날, 그의 자취방 바닥에서 뒤척이다 제이의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는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그는 분명 침대 위 누워 있는 데이지의 뒷모습만을 쳐다봤다. 못 본 척 그대로 다시 잠에 들었지만 그 기억은 저장되어 클라우드에 백업까지 되어있었다. 그리고 나도 알았다. 내가 끼어들 관계가 아니라는 걸. 어찌 되었든지 수습을 해야 했다. 데이지에게 사과했다. 사과의 의미로 데이지에게 술을 왕창 먹이려 했지만, 이상하게 뻗어버린 건 제이었다. 제이는 끝까지 이런 컨셉으로 가겠다는 건가.

  절전모드로 접어든 제이를 부축해 데이지와 함께 그의 자취방에 데려다줬다. 그녀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술을 더 마시겠냐고 묻자 그녀도 오케이 했다. 어디에서 마실지 물어보니 데이지는 자기 집으로 오라 했다. 4캔에 만원인 기네스, 블랑, 호가든, 하이네켄과 팝콘을 사들고 데이지의 방으로 갔다. 방은 그녀가 왜 제이의 방에서 자주 자는지 이해될 만큼 엉망이었다. 자기만을 기다리는 집사 딸린 전용 호텔이 있는 데이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난 기네스를 따고 그녀는 블랑을 마신다 했다. 한 모금을 하자마자 그녀가 본론부터 꺼냈다.

 

-, 그냥 모른 척 해줘.

-?

-너가 생각하는 모든 것.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도 잘 알잖아. 우리 같은 애들이 친구 사귀기가 얼마나 힘든지. 제이, 내 친구야. 대학 생활 거의 유일한 친구라고. 너라면 어떻게 할래? 너가 나라면 이런 남자 잘라낼 수 있어? 그래, 너 말대로 나 시즌마다 남친 바꿨지. 그게 뭐 어때서? 걔들이 날 좋아한다는데. 기회가 있는데 왜 가만히 있는 건데. 너라면 안 그럴 거야? 옷은 입어봐야 내 옷인지 알 수 있고, 구두도 신어봐야 내거다 싶은 거야. 한번 입어보라는데 왜 망설여야 하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건데?

-제이는 보풀 일어나는 보세라 입어볼 가치도 없다 이건가? 브랜드들이 쌓여있는데 눈 돌릴 필요도 없다 이거지? 설령 모른 척 해준다 하자. 넌 나한테 뭘 해줄 건데?

-뭘 해주긴 해줘. 그만해. 나도 한계가 있어. 제이는 제이야. 보세나 디자이너, 도메스틱이나 명품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나도 내가 제이한테 이러는 게 별로인거 알아. 근데 그래서 뭐. 난 좀 나쁘면 안 돼? 나쁜 남자는 괜찮은데 나쁜 여자는 안 되는 거야?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냥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기네스를 마치고 호가든을 땄다. 이상했다. 기네스는 흑맥주고 호가든은 밀맥주인데 맛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데이지도 데이지 나름의 문제를 겪고 있었다. 제이에게 그녀가 상처를 주었듯이 그녀 또한 다른 남자들에게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상처는 전염되니까.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상처는 남에게로 옮겨가는 건가. 알 수 없었다. 안타까웠지만 확인하고 싶은 게 더 있었다.

  데이지는 남은 하이네켄을 마시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장난을 쳤다. 그녀의 집에는 0.02mm짜리 장난감도 있었고 낭비할 시간 또한 충분했다. 몸을 기댄 건 데이지였지만 떠오르는 건 다른 여자였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는 제이를 생각했을까. 아니면 다른 남자를 생각했을까. 데이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미워한 건 데이지가 아니라 제이었다. 그를 정확히는 질투했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걸 가지고 있었다. 데이지를 처음 만난 밤, 제이에게서 발견한 건 희미한 빛이었다. 곧 화면 꺼질 아이폰의 밝기 정도라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놀랍게도 제이는 꾸준히 그 화면을 터치하며 마음을 버텨냈다. 내가 곧 꺼지리라 생각한 빛에 의지하여 마음을 붙잡아간 것이다.

  다음날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제이의 문자를 받았다.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데이지도 그 문자를 받았을까. 누구와 잤다고 자랑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나버렸다. 다음 날에 느끼는 건 두통과 울렁거림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하는 것인가. 데이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제이를 발라드라 비웃었다. 그리고 친구 여자와 잠을 자는 걸 힙합이라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찌질한 건 나였다. 마음껏 낭비할 수 있는 제이가 부러웠다. 낭비하는 것이 아까워 그동안 난 마음을 버려두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 마음이 그대로 남아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과 함께 사라질 것들이었다. 제이가 붙잡았던 희미한 빛은 나에겐 없었고, 그건 데이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이가 데이지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서비스는 생각해 보니 이런 것이었다. 그는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기대 없이 그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런 걸 무상보증서비스라 하면, 우스울까. 제이, 나의 개츠비. 보급형은 그가 아닌 우리였다.

 

글|김태현(문과대 서문16)

일러스트|조은결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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