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대 글로벌대 교수·한국학전공

 

  ‘범 내려온다가 뜨고 있다. 덩달아 이날치 밴드가 뜨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 ‘Feel the Rhythm of KOREA’는 유튜브에서 누적 조회 수 3억에 이른다고 한다. 옛날의 판소리가 아니라 오늘의 판소리를 하는 이날치 밴드, 아디다스 모자를 눌러쓰고 독특한 안무로 이 노래를 춤으로 구현하고 있는 댄스팀, 그리고 광고영상의 세련미를 제대로 담아낸 짧은 필름이 서로 합쳐져서 범 내려온다를 아주 날렵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와, 팀의 이름이 환상적으로 잘 어울린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은 그것에 걸맞은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야말로 세상의 이해에 대한 출발이라는 점에서, 올바른 이름을 갖는 것이야말로 정당한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이름은 그 사람이고 그 사물이다.

  전통사회에서 순수하게 우리말로 이루어진 사람이름이나 땅이름을 만날 때면 희한하게도 그 이름에 걸맞은 특징이나 형용이 제대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예컨대 안골이라는 동네 이름은 산자락의 사이에 깊숙이 감싸여 안온한 느낌을 주는 마을이 내 뇌리에 다가온다. ‘바우란 사람이름은 그 이름처럼 아주 우직하고 단단한 사내일 것이다. ‘덜렁쇠는 뭔가 일처리를 서두르고 덜렁거리는 사람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날뛴네는 무슨 일을 당하면 우선 화부터 내고 파닥거리는 여인네를 표상하고 있다. 제대로 붙여진 이름을 보면 그 대상의 특징이 금세 다가온다.

  19세기 중반에 살았던 판소리 명창 가운데 이날치란 분이 있다. 이날치라고 불린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가 어떤 스타일의 명창이었는지, 그 별명 같은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날치는 아주 날렵한 물고기이니, 그의 외양이나 그가 소리하는 모습이 마치 날치처럼 미끈하고 거뜬거뜬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부른 새타령은 묘사하는 방식이 날렵하고 미끈하여 수많은 구경꾼들이 경탄하였다고 전해온다.

  ‘새타령에는 우리가 아는 온갖 새들의 형용과 울음소리가 담겨 있다. 쑥국새는 이렇게 노래불린다. “저 쑥국새가 울음운다. 저 쑥국새가 울음 운다. 원산(遠山)에 앉아 우는 새는 아시랑하게 들리고, 근산(近山)에 앉아 우는 새는 흠벙지게도 들린다. 이산으로 가며 쑥국 쑥국’, 저 산으로 가며 쑥쑥국 쑥국--으어 좌우로 다녀 울음 운다”. 이 노래를 따라 읊조리다보면 이날치가 새타령을 불렀을 때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르지 않는가? 그가 새타령을 부를 때면 지나가는 새들이 벗부르는 소리로 알고 날개를 펄러덕거리며 모여들었다고 전해온다. 이날치는 자신의 소리를 잘 특징 지워주는 자기에게 아주 걸맞은 이름을 가졌다.

  그런데 한자어로 이름을 짓게되면 이런 생생한 이름들이 사라지고, 대신 판에 박힌 가문이나 이념이 그 이름 안에 자리 잡게 된다. 이름 지을 대상의 특징이나 현상을 진솔하게 반영하는 작명법 대신에, 이름을 통하여 개인이나 가문의 이념적 지향을 극명하게 보여주려는 쪽으로 이름짓는 법이 바뀌게 된다. ‘대복(大福)’이나 광훈(光勳)’ 같은 남자 이름, ‘정숙(貞淑)’이나 현미(賢美)’ 같은 여자이름에는 그 사람의 품새를 제대로 나타내기보다는 그 이름을 해석해야 나오는 허황된 지향을 표방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요즘 세상에서 모든 이름붙이기는 이렇게 허황되어, 이제 이름을 통하여 그 사람의 모양새를 짐작하거나 살펴보는 일이 아주 어렵게 되었다. 이렇게 허황된 이름 아래서 살아간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이 정당할 리 없지 않겠는가.

  내 이름이란 것도, 이름을 불러주거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채, 허황된 욕망만을 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다. 시인 김춘수도 제대로 된 이름을 갖고자하는 뜻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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