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마조 앉으면

기인 밤도 짧고나

희미한 등불 아래 턱을 고이고

단둘이서 나누는 말없는 얘기

나의 안에서 다시 나를 안아주는

거룩한 광망(光芒)”

 

  12일 본교 문과대학 서관 202호에서 전언호(문과대 국문19) 씨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접 작곡한 선율에 지훈의 시 사모(思慕)’를 노랫말로 붙였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기타 반주가 목소리를 감쌌다. 객석에 띄엄띄엄 자리한 청중들은 지그시 눈을 감거나 턱을 괴고 노래에 빠져들었다.

 

전언호(문과대 국문19) 씨가 기타를 연주하며 직접 작곡한 ‘사모(思慕)’를 부르고 있다

 

  사모하는 그대. 일찍이 세상의 광망이 된 지훈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본교 곳곳 지훈을 추억하는 행사가 9일부터 속속 열렸다. 미발간된 지훈의 육필시집 지훈시초가 처음 세상에 공개됐고, 여러 행사에서 노년의 인사와 초록의 젊음이 제자라는 이름 아래 운율을 함께 맞췄다. 나의 안에서 다시 나를 안아주던 스승과의 시간, ‘지훈주간으로 분한 일주일을 되짚어본다.

백 년의 詩, 천년의 文化
  조지훈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지훈주간’ 행사가 9일부터 열렸다. 다양한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캠퍼스 곳곳 걸려있다.

 

  친필원고에 담긴 지훈의 숨결

  9일부터 시작된 본교 박물관(관장=강제훈 교수)빛을 찾아가는 길 나빌네라, 지훈의 100특별전시회에서 지훈 선생이 육필로 쓴 미발간 시집 지훈시초가 최초 공개됐다. 1972년 지훈의 제자들이 생가에서 발견한 육필 원고뭉치는 책으로 출간돼 널리 알려졌지만, 그 육필원고 묶음 중 지훈시초는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다. 박유민 학예사는 지훈시초의 시 31편 11편이 1946청록집에도 실려 지훈시초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묻어둔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본교 박물관(관장=강제훈 교수)이 주최한 ‘빛을 찾아가는 길 나빌네라, 지훈의 100년’ 특별전시회에 지훈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지훈이 육필로 쓴 미발간 시집 ‘지훈시초’

 

  지훈의 필체엔 굴곡진 생애가 있다. ‘일본의 교육을 받는 것은 영원히 나라를 잃는 것이라는 조부의 교육관 아래 정규교육 대신 한학을 공부한 지훈이었다. 일평생 역사적 외풍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지조가 친필에 유유히 흐른다. 그의 등단작이자 대표작인 승무를 비롯해 봉황수’, ‘고풍의상등이 친필원고로 전시돼있다.

  전시회의 끝자락에는 그간 부각되지 않은 민족문화를 향한 지훈의 열정과 지향성이 담겨있다. 초대 소장으로 재임하며 고전한국학 연구와 한국문화사 연구의 초석을 놓은 민족문화연구소의 현판을 그대로 가져왔다. 학문적으로 불모 상태였던 한국문화사 연구를 개척한 종합적 연구 결과물로 평가받는 <한국문화사대계>는 전 7권을 모두 전시했다.

  박유민 학예사는 일제 치하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고, 해방 직후 민족문화의 토대가 부족했던 현실에도 선생께서는 우리 글의 아름다움과 멋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셨다고 말했다. 전시회는 2021320일까지 진행된다.

 

  위로 올렸다가 떨어지는

  그를 아무도 받지 않았다

  “요즘으로 따지면 비대면 강의의 선구자셨지요.” 11일 열린 추모좌담회에서 오탁번(사범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는 가르침이 없어도 가르침을 받았던 시절을 회상했다. “조지훈 선생이 몸이 편찮으셔서 한 학기에 세 번쯤 수업에 나오셨어요. 수업시간엔 주로 도서관에서 그분이 쓰신 책을 읽고 배웠지요.”

  “조지훈 선생의 문학개론 학기말 시험에서 지금까지 봤던 시험문제 중 가장 짧은 문제가 나왔습니다.” 김흥규(문과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당시 학기말 시험에서 지훈이 냈던 시험 문제를 회상했다. “1시간 내내 한 페이지 넘게 답을 썼었는데 그런 시험문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최동호(문과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도 지훈의 시험에 대해선 여남은 말이 있었다. “동기들의 평을 빌리자면 선생님 수업의 학점은 상당히 짰습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명강의. 홍일식(문과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1950년 본교의 3대 명강의를 뽑자면, 김상협 교수의 정치학개론, 조동필 교수의 경제학개론, 그리고 지훈의 문학개론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세 과목은 서울대 학생들이 와서 같이 듣기도 했어요. 당시 지훈 선생은 걸어다니는 사전으로 불렸습니다.”

  연로한 학자들 눈에 흐르는 여전한 총기. 최동호 교수는 조지훈 선생의 강의를 들은 마지막 세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이후 선생의 고사이상의 작품을 써보겠다는 문학적 의지를 갖게 됐다고 전했다. 김흥규 교수가 지나온 학자의 길에도 지훈의 뜻은 생생하다. “해방 후 남북이 분단돼 하나의 역사집단이 상이한 체제 속에 살게 됐는데 민족이라는 이름은 정치체제를 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었습니다. 지훈의 이런 뜻이 제 연구에도 스며들었어요.”

  너무 일찍 져버린 스승의 생. 그를 지탱 못했던 제자는 지난 한을 담아 추모시를 낭독했다. 오탁번 교수는 지훈이 독재정권에 항변할 때 우리는 비겁하게 선생의 뒤에서 박수만 쳤다떨어지는 지훈을 아무도 받지 않았음에 대한 분노를 담았다고 전했다. 오탁번 교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시구를 뱉었다. ‘위로 던져 올렸다가 떨어지는 그를 아무도 받지 않았다

 

  우리는 영원한 지훈의 제자다

  지훈이 죽음을 앞두고 적은 시 ()에게’, 시에서 지훈은 평생을 괴롭힌 지병을 오랜 벗, 뉘우침을 주는 존재로 묘사한다. 병마에 대한 초연한 태도는 코로나19를 벗 삼는 새내기에게 위로가 됐다. 한희화(문과대 국문20) 씨는 시를 읽고 우리 사회에 찾아온 병인 코로나19가 떠올랐다코로나19는 아픔을 주는 존재임이 틀림없지만, 지훈의 태도처럼 우리도 이 바이러스를 한동안 같이 지내야 할 동반자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12일 열린 조지훈 시 낭송 축제에서 김종훈 교수의 현대시인론수강생 11명은 본인에게 의미가 있는 지훈의 시 한편씩을 골라 낭송했다. 행사 공연, 해설부터 홍보, 유튜브 중계까지의 전 과정을 도맡아 준비하기도 했다.

 

지훈의 추모시를 낭송하는 오탁번 명예교수

 

  낭송회에선 지훈의 삶에 대한 해설을 큰 줄기로 하나하나 낭송이 이어졌다. 등단부터 죽음까지 삶의 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할 때면 학생들이 관련 대표작들을 다듬어진 목소리로 꺼내보였다. 낭랑한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질 때마다 지훈의 따뜻한 심상과 풍요로운 음성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목월은 지훈의 완화삼을 읽고 답시로 나그네를 썼어요. 나그네의 고독에 응답하는 목월의 존재가 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 같아요.” 지훈의 완화삼을 낭송한 김민하(문과대 국문16) 씨가 말했다. 행사에 참석한 조지훈 선생의 아들 조태열 씨는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이 아버지를 기리는 행사를 열었다는 것이 감동이라고 밝혔다.

 

행사에 참석한 조지훈 선생의 아들 조태열 씨

 

  본교 도서관(관장=석영중 교수)은 창고로 쓰던 도서관 4층 한 자리를 지훈의 서재로 꾸몄다. 열람실에는 1982년 지훈의 유족들이 본교 도서관에 기부한 1200권의 도서가 꽂혀있다.

  열람실 입구 현판에 옛 도서관 건물을 등지고 선 지훈의 흑백사진과 수기로 무심하게 써내린 趙芝薰의 이름이 방문객을 반긴다. 열람실은 자연과 전통의 순수한 서정을 강조했던 지훈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현대적인 벽지, 발레비치, 이브 클라인의 미술 작품과 고전적 테마의 책걸상, 지훈 선생이 직접 소장했던 고서는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오묘한 분위기는 청록파라는 틀만으론 정의하기 힘든 지훈의 개성과도 닮아있다. 학술정보서비스부 직원 이문형 씨는 지훈 선생만을 기리는 공간보다는 학생들이 편하게 학습 공간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꾸몄다고 전했다.

 

한 노신사가 본교 박물관에 전시된 지훈의 유품을 바라보고 있다.

 

  지훈 주간 이후에도 조지훈 열람실은 계속해서 운영된다. 지훈 선생의 문학을 즐기기 위해서든, 공부할 곳을 찾아서든, 스승의 자취는 언제나 제자의 발걸음을 반기고 있다. 지훈의 숨결이 곁에 남아있는 한, 우리는 그의 영원한 제자다.

 

그대 모습은

운명(運命)보담 아름답고

크고 밝아라

물들은 나뭇잎새 달빛에 젖어

비인 뜰에 귀또리와 함께 자는데

푸른 창가에 귀기울이고

생각하는 사람 있어

밤은 차고나

 

 

글 | 강민서·이승빈·천양우 기자 press@

사진 | 김민영·박소정·이다연·이윤 기자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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