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수 의과대 교수·의학과
한창수 의과대 교수·의학과

 

  누구나 삶의 대의명분이 있다.

  현자들은 굳이 왜 사는지에 마음고생하지 말고, 그저 그날 주어진 것에 충실한 것이 현명한 삶이라고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공부를 하고 돈을 버는 이유, 또는 살아가야할 명분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대의명분은 공정과 신뢰이고, 사람에 대한 공감이 그 기본이다. 사회의 리더들은 공정과 공감이라는 슬로건을 서로 가져가려 애쓰고, 스스로 공감 그 자체라 주장한다. 마치 공감이 물건의 상표처럼 브랜드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공감(共感)의 사전적 정의는 남의 의견이나 주장에 대하여 똑같이 느끼거나, 남의 기쁨과 슬픔을 접할 때 그 대상과 같은 감정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Empathy’ 또는 ‘Sympathy’라고도 부르는 공감은 다른 것일까? 상대방의 인생을 듣고 그 아픔이나 기쁨을 느끼는 것이 공감의 시작이다. 그로 인해 분노하거나 슬픔에 겨워 내 옷과 먹을 것을 그에게 주면서 온몸을 투신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감 (sympathy)이다. 연민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감정이입은 하되 이성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줄이고 스스로 일어나도록 사회 변화를 고민하는 것은 조금 다른 형태의 공감(empathy)이다. 그 감정을 느끼고 이해는 하지만, 휩쓸리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을 도우려는 상태이다.

  정신과의사나 심리학자가 말하는 공감은 후자인 경우가 많다. 신경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공감능력을 타고난 사람도 있지만, 노력과 수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섣불리 동정하거나 분노에 휩쓸리는 것은 지극히 일시적이고, 유효기간이 짧은 감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에만 의존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삶이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억눌리고 소외된 이웃에게 공감하고 분노하는 이들은 많다. 그 힘으로 이루어낸 사회적 변화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보여주며 동정심을 자극하고, 말랑해진 사람들로부터 본인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인자하고 세상 욕심 없는 미소로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유하지만, 정작 자신과 자식들은 정의 또는 선교라는 이름으로 좀 더 편리한 삶을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타인에겐 엄하게 작용하는 잣대가 자기 자신에게는 너그러워지는 시점은 이미 지나갔다. 인간의 감정에 근거한 행동이라는 것은 오래 지속할 수가 없기에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대의명분은 그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브랜드일 뿐이다. 단어 자체로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삶의 공감을 내세우며 타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로만 정의와 공감을 이야기하며 타인이 이뤄낸 것으로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사람. 일상생활 속 사이코패스가 그들이다.

  잘못된 공감이라는 것도 있다. 인터넷을 가득 채우는 뉴스를 보면 자본주의의 꿀과 악이 다 모여있다는 미국 서구사회 그 뒤편에는 뒷거래와 뇌물, 결탁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적어도 그들은 그런 짓을 할 때 나쁜 짓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 것 같다. 당사자는 늘 이를 부인하고 숨기려고 하고, 시민들은 그들의 악함이 드러나면 여지없이 그 가면을 벗겨 내린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추악함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도 내가 공감했던 그 사람을 무조건 지지한다. 나와 공감한 그들만이 선하고 대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심리학자 폴 블롬은 그의 책 <공감의 배신(Againt Empathy)>에서 편협된 공감, 정의롭지 못한 공감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감정에 호소하는 한 실험에서 어린 심장병 환자를 위해 이식수술 순서를 양보할 것을 권유했더니, 감정적으로 동요한 구성원은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내가 공감한 이 아이를 먼저 수술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내가 한번 공감한 내 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의는 종교 전쟁과 같은 비극도 서슴지 않게 만든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비이성적이고 부당한 결정을 이끌어 내기도 하는 것이 감정적 공감의 부작용이다. 막상 그런 편협한 공감을 해 준 사람들은 정신 차리고 나면 결국 전리품의 분배를 원하게 된다.

  전문가의 조건이라는 것이 있다. 전문가적인 합리성을 가지고, 일과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소위 선함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는 굳이 말로 공감과 공정을 부르짖지 않아도, 그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어쩌면 세상은, 역사는 그런 시민들 때문에 성장해 가는 것이리라. 내가 공감했던 그 감정을 똑같이 가지라고 사람들을 정신교육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시험하나 잘 봤다고 높은 자리 올라가는 게 아니고 좋은 대학 나온 것으로 평생 울궈먹지 못하듯이, 한번 공감하여 울고 분노했다는 것이 평생 유지되는 나만의 특권은 아니다. 공감이라는 대의명분은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을 위한 깃발이기도 하고 브랜드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삶의 태도여야 한다.

  공감을 외치면서 감정을 자극하여 본인의 이익을 꾀하는 사람들은 그저 위선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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