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아픔 예술적 연대로 견뎌

그림과 글의 만남 조명한 인쇄미술

문인과 화가의 진한 우정 돋보여

 

  1930년대의 시는 음악보다 회화이고자 하였다. -김광균

 

  1910년부터 1945년, 칠흑 같던 시대 속에서도 예술만은 불꽃처럼 타오르길 바랐던 사람들이 있다. 당대 문학인과 미술인들은 활자와 이미지의 경계를 뛰어넘어 뜨겁게 교감했다. 정지용, 이상, 김기림, 김광균 등의 시인들, 소설가 이태준과 박태원, 그리고 구본웅, 김용준, 최재덕, 이중섭, 김환기와 같은 화가들이 이 시기 활동하며 영감을 주고받았다. 서로에게 버팀목이자 자극제였던 이들은 모순된 사회 속에서도 예술의 진실한 가치를 믿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 첫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가 2월 4일부터 5월 30일까지 덕수궁관에서 진행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 작품뿐 아니라, 문예인들의 깊은 우정과 관계를 집중 조명했다. 전시를 총괄한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사는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가의 생각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당시 문학가와 미술가들이 주고받은 영감 속에 그 해답이 있다”며 기획 취지를 밝혔다. 또한 “시대적 아픔 속에서도 이토록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귀하고 기적적”이라며 이번 전시의 남다른 의미를 전했다.

  전시는 총 4개 기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1930년대 전위 예술가들의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살펴보는 ‘전위와 융합’, 1920~1940년대 문인과 화가의 만남의 장이던 인쇄매체에 집중한 ‘지상(紙上)의 미술관’, 예술가들의 각별했던 우정을 조명한 ‘이인행각(二人行脚)’, 그리고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문학적 재능 또한 탁월했던 작가들을 소개하는 ‘화가의 글·그림’으로 짜여졌다.

  미술 작품 140여 점과 서지 자료 200여 점을 관람할 수 있으며, 한묵의 ‘검은 생선’, 이승만의 ‘박종화의 금삼의 피 삽화’, 이여성의 ‘사계산수도’ 등 쉽게 보기 힘든 작품들을 선보여 더욱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라 나무’를 향한 관심이 뜨겁다.

 

예술의 전위를 개척한 모험가들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선구자 구본웅이 1935년에 그린 ‘친구의 초상’을 시작으로 전시는 막을 연다. 매섭고 형형한 검은 눈, 유난히 붉은 입술, 수척한 얼굴의 ‘친구’는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거친 질감과 강렬한 색채 대비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구본웅 특유의 야수파 화풍이 돋보인다. 그림 속 친구는 소설 ‘날개’의 작가이자 천재 시인 이상으로 추정된다.

  제1 전시실 ‘전위와 융합’에서는 1930년대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화를 바탕으로 ‘현대성’의 징후를 가장 먼저 체험한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이 시대 전위적 예술가들은 이전 전통시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가교로 자리한다.

  1934년, 시인 이상은 서울 종로에 다방 ‘제비’를 열었다. 우울한 화풍의 자화상, 쥘 르나르와 장 콕토의 경구가 적힌 액자, 그리고 의자와 탁자 몇 개가 전부인 초라한 아지트에서 문인과 화가들은 예술과 인생을 논하고, 시대와 민족을 뜨겁게 부르짖었다. 박태원, 김기림 등의 문인과 구본웅, 길진섭, 김환기와 같은 화가들은 문학과 미술, 음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제비’의 벽에는 이상의 절친 구본웅의 작품 등 다양한 화가들의 그림이 걸렸다. 구본웅의 ‘인형이 있는 정물’(1937)이 대표적이다. 그림 속 테이블 위에는 신문과 프랑스 미술 잡지, 목각 인형과 과일이 너저분하게 놓여있다.

  전시관 한구석에 자리한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삽화 드로잉도 눈에 띈다. 그는 마치 영화를 찍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삽화를 그렸다. 열애의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특정 문구를 줌으로 끌어당기듯 확대 묘사하기도 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천변풍경’으로 잘 알려진 그는 1933년 동아일보에 소설 ‘반년간’을 연재하며 작품의 삽화도 그렸다. 박태원의 삽화 바로 옆에는 이상, 김기림 등이 직접 얼굴을 그려 넣은 박태원의 결혼식 방명록이 펼쳐져 있다. 내로라하는 당대 문인들의 개구진 초상화가 인상적이다.

'친구의 초상' - 구본웅 作
'친구의 초상' - 구본웅 作

 

소설 '반년간'의 삽화 - 박태원 作
소설 '반년간'의 삽화 - 박태원 作

 

  틀을 깨고 인민 속으로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가장 새롭고, 가장 강력한 미술양식에 인쇄미술이 있다. 서적의 장정, 그것만으로도 그 나라의 문화수준의 적은 한 면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현웅

 

미술, 문학을 품다

  제2 전시실로 이어지는 ‘지상의 미술관’에서는 1920~40년대를 중심으로 확산된 ‘인쇄 미술’을 집중 조명한다. 지상(紙上)의 ‘지’는 종이 지(紙)를 쓰고 있다. 드넓은 도서관 속 신문 진열대 느낌이 나는 이곳은 중장년층에겐 향수를, 10대와 20대에겐 레트로 감성을 자극한다. 당대 문인과 화가의 결합인 ‘화문(畵文)’이라는 장르가 돋보이는 기획이다.

  미술인들은 시집의 표지화와 신문 소설 삽화를 그렸다. 관람객은 안석영을 비롯해 노수현, 이상범, 정현웅, 이승만, 김규택 등이 작업한 다채로운 삽화를 만날 수 있다. 1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된 백석의 ‘사슴’부터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정주의 ‘화사집’ 등 수많은 문예인을 매료시킨 책들의 원본이 전시돼 있다.

  ‘지상의 미술관’은 문학과 미술의 만남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공간이다. 제2 전시관 기획에 특히 정성을 기울였다는 김인혜 학예사는 “400장 정도의 여러 인쇄미술 이미지를 과감하게 공개했는데 많은 관람객들이 ‘지상의 미술관’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미술과 문학의 특별한 관계는 제4 전시실 ‘화가의 글·그림’에도 잘 드러난다. 특히 문예지는 미술과 문학의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다. 1955년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의 창간호부터 1987년 7월호까지 표지를 모은 전시작품이 눈길을 끈다. 장욱진, 천경자, 김환기 등의 그림이 문학잡지의 표지를 장식했으며 이는 문인과 화가의 만남의 장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또한 제4 전시실에서 김용준, 장욱진, 한묵, 박고석, 천경자, 김환기 등 6인의 작가들이 남긴 글과 그림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그림이 문학이 되고 글은 미술이 됐던 당대의 작품은 독특한 감동을 선사한다.

'진달래꽃' - 김소월 作
'진달래꽃' - 김소월 作

 

예술가들 사이의 진한 우정

  각별한 연대감을 보여준 문학인과 예술인의 관계 또한 인상적이다. 제3 전시실에서는 정지용과 장발, 백석과 정현웅, 김기림과 이여성, 이태준과 김용준 등 문예계의 대표적인 문학가-미술인 ‘쌍’들의 작품과 관계를 짚어본다. 뜨거운 우정을 나눈 이들의 일화와 작품을 소개한다.

 

  #1. 1955년 1월, 개인전이 실패하자 절망에 빠진 이중섭은 가족과 연락마저 끊고 경북 왜관의 구상 집에 얹혀 살았다. 전시작 ‘시인 구상의 가족’은 그 보답으로 이중섭이 구상에게 선물한 그림이다. 자전거에 아들을 태워주는 구상을 보는 이중섭의 마음에는 친구에 대한 우정과 그 가족에 대한 부러움이 가득해 보인다.

  #2. 당대 최고 삽화가 정현웅과 시인 백석의 인연은 조선일보 출판부 옆자리에서 시작됐다.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 잡지 <여성>에 실린 백석 시, 정현웅 그림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푹푹 내리는 눈,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하는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모습이 일품이다. 정현웅은 백석의 옆 얼굴을 그려 잡지 <문장>에 발표했고, 백석은 만주 여행 중 지은 시 ‘북방에서’를 정현웅에게 헌정했다.

  #3. 조선일보 사회부장과 신입 기자로 만난 이여성과 김기림. 둘은 누구보다도 지적인 세계관을 공유했다. 김기림은 당시 이여성의 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50개 이상의 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냐 하면 간단없는 전화가 그를 습격하기 위하여 모든 순간순간에 그의 테이블 위에서 소리치고 있으니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정현웅 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정현웅 作
'한강의 포플라 나무' - 최재덕 作
'한강의 포플라 나무' - 최재덕 作

 

  김인혜 학예사 | “이 전시가 관객들에게 너무 어렵게 느껴질까봐 조금 걱정을 했어요. 사실 등장인물도 많고 사람들의 관계망도 복잡하잖아요. 그런데 전시에 등장하는 40여 명 중에 한두 명만 알아도 전시를 즐기실 수 있어요. 아는 작가 하나를 통해 연결점을 찾아 이어가며 감상하다 보면, 즐기면서도 배우고 알아가는 재미 또한 느끼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 시대 예술가들의 삶과 열정 속에는 굉장한 감동이 있어요. 시대를 뚫고 나오는 힘이 느껴지기도 하고,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되기도 하고요. 관람객들이 당대 예술가들의 자취를 통해 가슴 뛰는 작품을 꼭 만나시면 좋겠습니다.”

 

글 │ 이다연 기자 idayeoni@

사진 │ 김소현 기자 sosoh@

사진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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