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박찬세 교우의 추도식을 마친 후, 유가족과 지인들은 4.18선언문 기념동판 앞에서 고인의 유지를 기렸다.
故박찬세 교우의 추도식을 마친 후, 유가족과 지인들은 4.18선언문 기념동판 앞에서 고인의 유지를 기렸다.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박찬세(법학과 55학번) 교우가 지난 6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본교 4·18 의거 당시 고대신보의 편집국장을 맡아 학생의거를 이끌었다. 1973년 이후 청와대 공보비서관과 제1무임소장관실 정책조정실장 등을 거쳐 국토통일원에 근무했고, 통일연수원장직을 역임하는 등 민족통일을 위한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13일 오전, 4·18 기념탑 앞에서 통일산악회와 고대신문동인회 주관으로 박찬세 교우의 추도식이 진행됐다. 추도사는 고인의 절친한 벗인 홍일식 본교 전 총장이 작성했으며, 이강식(사회학과 71학번) 장례위원장이 대독했다. “61년 전 이 나라의 민주화를 염원했던 청년 石岳의 꿈이 오늘에 부활해, 이 혼돈의 시대에 길을 잃고 헤매는 청년들의 앞길에 등불이 되기를 기원한다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 고인이 생전 집필한 4·18 의거 선언문은 천양우 고대신문 편집국장이 낭독했다. 추도식을 마친 후 고인은 국립 4.19민주묘지에 안장됐다.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1960년 고대신문(당시 고대신보) 편집국장이었던 박찬세 교우는 42<우리는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인 지식인을 거부한다>는 제목으로 사설을 작성했다. 신문사 지도위원 교수들이 집필하던 사설을 학생 편집국장도 쓸 수 있도록 개편한 직후, 4·18 의거를 불러일으킨 역사적 문장을 적어냈다.

  그의 사설은 당시 학생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에 불을 지폈다. 당시 취재부장이었던 이용묵(경제학과 58학번) 교우는 신입생에게 보내는 이 글로 학내 분위기는 한동안 긴장감이 팽배해지며 폭풍전야와 같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고 회고했다.

  이후 고인은 친애하는 고대 학생 제군!’으로 시작하는 고려대학교 4·18 의거 선언문을 작성해 본교 학생들에게 독재정권에 분노해 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4·18 궐기 당일 인촌 동상 앞에서 당시 정경대학 학생회장이었던 이세기(정치외교학과 57학번) 교우가 낭독한 고인의 선언문은, 영구 불발이 될지도 몰랐을 새 역사를 결정적으로 앞당긴 글월이 됐다.

  고인은 이후 민족통일 문제로 눈길을 돌려 1981년부터 15년간 국토통일원에 근무했고, 통일연수원장직을 10년간 역임하며 통일사업의 기반을 닦았다. 홍일식 전 총장은 石岳은 후덕하면서도 심지가 곧아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거인으로 불렸다그가 떠나더라도 그의 의지와 예지는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대신문 동인 권태경(토목공학과 75학번) 교우는 고인께서는당신의 업적과 인품 덕에 언제나 존경받는 어른이었다며 그런 어른을 잃은 것은 우리에게 큰 슬픔이라고 애도의 말을 전했다.

 

박지선·장예림 기자 press@

사진서현주 기자 zm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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