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만에 부녀지간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가까운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렀다. 개강을 하면서 다시 서울 자취방으로 올라온 뒤 함께한 첫 식사. 아빠는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 무슨 일은 없냐는 애정 어린 물음에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을 털어놨다.

  대화가 오가는 중, 주문한 스테이크와 파스타가 준비됐다. 아르바이트생은 친절하고 상냥한 인사와 함께 맛있게 드세요라며 음식을 세팅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참 친절한 것 같아. 예의도 바르고. 내가 젊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아빠가 말했다. 아빠는 내 또래 사람들이 말투도 사근사근하고 상냥하게 사람을 대한다고 했다. 사회가 변하면서 교양도 생기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배워서 그런 청년들이 많아진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조용히 그 말을 듣던 내 머릿속에서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알바 자리마저 구하기 힘든 시대, 요즘 알바생이라면 친절한 말투와 목소리는 디폴트값이다. 하지만, 아빠는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상냥한 목소리 뒤에 숨겨진 저 잿빛 눈동자를. 아마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도, 친절한 목소리도 특별한 의미를 담지 않은 매뉴얼의 일부일 거다.

  저 알바생의 눈동자에 영혼이 없다는 것을 나는 한 눈에 알았는데, 왜 아빠는 몰랐을까. 아빠가 내 나이대의 청년이었을 시절, ‘친절함이란 그저 사람의 성품, 성격이었을 것이다. 은행에 가서는 통장업무를 보고, 식당에 가서는 주문한 음식을 내오는 것. 당시 서비스는 그 일과 그 목적에 부응하는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자식의 세대. ,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단순한 서비스 제공이 아닌 친절과 상냥’, 친절하게 제공하는 것까지 포함돼야 서비스다.

  우리는 친절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가 가진 친절을 사고판다. 겉으로 보이는 친절에도 에너지가 쓰이고 그 가용가능한 에너지에는 총량이 있다. 외양에 공을 쓴 나머지 속은 점점 비어지고 있다. 이 시대의 친절은 남을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쓰이고 있다. 끌어당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아빠와 함께하는 이 자리가 서로 친절하지 않아도 편안한 게 아닐까?

송정현 기자 lipton@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