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빈 | 성신여대 인문융합연구소 전임연구원 · 문학 박사
박수빈 |
성신여대 인문융합연구소 전임연구원 · 문학 박사

 

  이 박사학위 논문은, 우리나라의 근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광수, 김동인, 채만식을 대상으로 동일한 목적을 갖고 쓰인 친일문학 내부에 숨겨진 각기 다른 친일에의 동기, 문학적 개성, 자기규정과 식민지적 정체성에 주목하여 친일문학(인)의 내적 논리가 구축되어 가는 과정을 살핀 것이다. 세 작가가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은 첫째, 이들이 일제 말 동일한 어용문인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소속되었던 사실, 둘째, 그들의 친일문필활동이 나름의 내적논리를 구축하고 국민문학론을 고민한 적극적 수준이었다는 점(단순히 협력적인 선동문이나 일본과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찬양하는 친일문건이 아닌, 다수의 문학작품을 창작했던 것이다), 셋째, 세 작가를 비교하여 살펴볼 때 각각의 특성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 결정적으로 이들이 해방 후 자신의 친일행적 및 친일문필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회고’를 ‘문학적인 방식’으로 행하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일제말기 친일문인들은 대중적 지도자나 사상가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제국일본과 조선 사이의 ‘번역자’로 살아왔지만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해방은 이들을 순식간에‘민족의 죄인’이자 평범한 인민의 한 사람으로 끌어내렸다. 해방공간에서 친일문인들은 제국일본의 식민지배이데올로기를 조선(인)에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이상으로,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자기변호’의 텍스트를 생산해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친일문인들의 해방기 회고는 문인의 내적 욕망과 외부적 압력이동시에 작용한 결과라는 점, 시대와 이데올로기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문학적, 사회적 생존을 모색하기 위한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일제말기의 ‘친일문학’과 매우 닮아있다. 지면의 한계가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처음에는 세 작가 중 가장 희미했으나 논문을 완성한 후에는 가장 마음을 울렸던 작가 채만식을 중심으로 논의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나는 문인보다 문충(文蟲)에 가깝다”

  채만식, 그는 누구인가. 중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서 <탁류> 또는 <태평천하>를 통해 우리는 익히 그를 알고 있다. ‘세태 풍자’와‘리얼리즘’ 등 몇 가지 키워드로 그를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여러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그려낸 작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런 그도, 친일문학인이었다. 그는 일생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작가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친일작가들의 친일문필활동이 바로 이 피식민자의 콤플렉스에서 출발하지만, 채만식의 것은 단순히 조선인으로서의 콤플렉스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민족개조론>을 썼던 이광수의 경우, 그에게 조선은 ‘초극’해야 할 대상이다. ‘피식민자로서의 나’를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의 내부에서 일관된 힘의 논리로 읽히고 있다. 김동인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친일에 투신하여, 친일논리의 자기화 과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매우 전략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친일문학 그 자체보다는 일제에 친일문학인으로 인식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문학은 도구가 되어줄 수 있었다. 반면 채만식은 복잡한 면모를 보인다. 문인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그리 대단하게 평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만식의 일제말기의 비평(적)텍스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요한 키워드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바로 ‘환경’이다. 채만식의 글 속에서 환경은, ‘배경’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이기도 하고, 글에 따라 ‘시대’,또는 ‘사상’을 뜻하기도 한다. 시간적·공간적·사회적 여건이 달라진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가 택한 친일문학에의 투신은, 변해버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개인의 순응이자 적응의 결과였다. 채만식은 세상이 바뀌었다는‘순응적 태도’와 함께, 이 시점에는 이미 해묵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1922)을 들어 자신의 친일론을 만든다. 조선민족의 민족성을 비판하는 내용들을 글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광수가 조선민중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에서 反민중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신과 조선민중을 분리시키고 거리를 두는 것과 달리, 채만식은 자신도 그러한 조선인임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광수에 동조하지만, 결코 이광수가 될 수 없는 채만식만의 특성이 여기 있다. 이렇듯 조선민중을 부정하지도 타자화하지도 못하는 채만식의 내면은 부정적, 반성적, 허무주의적 글쓰기 태도로 나타난다. 새로운 체제에 대한 채만식의 수동적 태도는, 결국 현실의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탁류', '태평천하'로 잘 알려진 채만식은 인간과 문학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탁류', '태평천하'로 잘 알려진 채만식은 인간과 문학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세계적인 대문호가 살아오더라도...

  그럼에도 그는 오랫동안 근대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자였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이익을 보장받는 전체주의에 감화되었고 이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했다. 또한 그는 여러 편의 글에서 조선문학은 “병 자주 앓은 아이”로 그로 인해 “신체발육이 더딘” 상태라고 규정하면서, ‘문학 이전의 시대’라는 둥, ‘문청기를 면치 못한 경우’ 등으로 조선문학의 현실적 한계를 강조하여 표현했다. 이러한 관점과 위의 키워드를 종합하여 볼 때, 일제말기 채만식의 문학관에서 가장 중요한 대전제는 ‘문학은 현실적 제조건의 제약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선문학의  현상태는 현실적 조건의 한계에서 기인한다는 그의 논리는 채만식이 친일문학작품을 창작하고, 친일문필활동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인간과 문학은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들 가운데, 친일에 대한 변(辯)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이데올로기에의 순응과 전쟁소설

  채만식은 이 시기 친일‘전쟁소설’을 주로 썼다. 일본군의 군사력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근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죽음을 앞둔 군인들이 궁성요배를 하거나, 장기가 몸 밖으로 나온 병사가 ‘천황폐하 만세’를 부른 후에야 쓰러졌다는 내용 등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당시 일본이 강조하고 자랑한 ‘군국 전통의 정신위력’을 잘 보여주고 홍보하는 서술이기도 하다. 채만식의 전쟁소설은 실제 인물명, 부대명, 지명 등을 그대로 사용하고, 날짜와 수치 등을 사실적으로 써서 현장감과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가 전쟁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일본군 특유의 ‘정신위력’이기 때문에 군인의 영웅적인 모습을 과장하여 만들어내고, 전쟁에서의 죽음을 숭고한 전사로 의미화 한다. 이는 제국일본의 군국주의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전투를 대함에 있어서 모든 제약과 한계를 ‘정신’으로 극복하려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정서적 군국주의(Gesinnungsmilitarismus)’로 설명된다. 정서적 군국주의는 모든 사고, 가치체계를 포괄하는 것으로 군의 제도, 형태, 결정양식, 정신상태를 민간의 그것보다 상위에 두는 상태를 뜻하고, 이러한 경향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 독일과 일본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채만식의 일제말기 전쟁소설은 ‘전체적 군국주의’와 ‘정서적 군국주의’의 결과물이다.

 

<민족의 죄인>과 ‘죄인의 민족’

  해방에 대해 채만식은 “나는 八·一五의 그런 편안한 해방을 우리가 횡재할 것은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해방기 채만식의 자전적 소설인 <민족의 죄인>(1948~1949)은 우리 연구사에서 친일에 대한 ‘회고’와 ‘반성’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며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 된 텍스트다. 이 작품에서 채만식은 반성과 변명을 중첩시키는 전략적인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그의 진의를 파악하고 나면 이 글은 자기변호의 텍스트임이 분명해진다. <민족의 죄인>에서 채만식은 죄에 대한 인정과 동기에 대한 부정을 반복한다. 그가 인정하는 것은 과거 대일협력을 한 행위 그 자체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결코 진심으로 일본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을 ‘용렬하고 나약하여 죄인이 된 자’로 규정하는 그는, ‘억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훨씬 더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했던 이들은 해방 후 오히려 잘 살고 있는데, 나는 주변의 비난을 받으며 그 낙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괴롭다는 것이다. ‘조선인의 대부분이 죄인’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실제 해방기 친일배격을 표면에 내세운 이들의 상당수가 과거 ‘조선문인협회’의 회원으로 주도적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해방 후 그를 둘러싼 환경이 또 한 번 변화했지만, 이번에 채만식은 그대로 순응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 죄의 대가를 받을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으로 자기풍자와 자기폭로의 작품세계를 형성하고, 작고할 때까지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구한국의 몰락, 일본의 지배, 해방까지. 이 시대를 살아간 채만식에게 있어 한 번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여전히 세계의 비주체적 존재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그(우리)에게서 ‘식민지 근대성’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동아일보 기자 재직시절 채만식
동아일보 기자 재직시절 채만식

 

 

KU연구실 너머

  ‘평가’하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당시를 살아보지도 않은 제가, 그 시대의 한 가운데 서 있던 이들에 ‘비판’의 칼날을 겨누는 일이란 너무 간단한 데가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연구가 단순하고 손쉬운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이 연구는 과거 친일문인과 연구자들이 숨기거나 외면하려 했던 우리문학의 치부를 폭로하고, “수치에 찬 블랭크”를 채우고 있습니다. 공(功)이 많은 이들의 과(過)만을 부각시키는 것 같다며 누군가는 이 연구를 불쾌해 했으며, 반대로 누군가는 왜 그들에게 굳이 의미부여를 해주느냐고 싫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친일을 묻는 문제는 여전히 ‘감정’의 영역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전히 친일이 논쟁적인 시대에서 저는, 이 모든 감정들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우리 옆에 남아있는 것을 목도합니다. 그러나 오욕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기에 남아있는 작은 목소리 하나까지 귀 기울여 들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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