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합격했다!” 적막하던 사무실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돌아보니 입사 20년 차 PD의 목소리였다. 새 프로그램 런칭을 위한 기획서 공모전의 1차 합격 소식이었다. 조만간 PT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도 이어졌다. 축하를 전하고 곧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취직만 하면 끝나는 것 아니었나..?’

  취업을 슬슬 걱정해야 할 때. 인턴 지원을 위해 이력서 총알 난사를 했다. 합격 메일을 확인하려 메일함을 들락날락하길 수십 번. 서류 통과가 너무 힘들어. 지겹다고 말하길 수백 번.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도 덥석덥석 받았다. 취직만 하면 이 지겨운 고통이 끝날 거라 버티고 있었는데. 세상에나, 못해도 우리 아빠와 동년배일 텐데 서류 합격했다고 기뻐하고 있다니.

  “나이 들어서도 서류 제출하고, 합격하고, PT를 해야 하나 봐요. 전 취업만 하면 하고 싶은 프로그램 다 만들 줄 알았어요.” 사회초년생의 얼빠진 질문에 한참을 웃던 어른들은 곧이어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네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더 무서운 거 알려줄까? 졸업한 지 30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학점 증명서 내라는 곳도 있어. 그리곤 덧붙였다.

  “그래서 지금을 열심히 사는 거, 그거 되게 중요해.”

  열심은 커녕 하루를 버텨내는 것도 벅찬 사람에게 현재를 충실히 살라는 뻔한 말을 하다니. ‘그건 직장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소리잖아요.’ 모난 말들이 목구멍에서 굴러다녔다.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열심히 살아야겠어요. 그러다 생각했다. 내 삶에 지금이 있었나? 내가 요새 휩싸였던 고민은 과거의 실패에 대한 후회와 그에서 비롯된 미래에 대한 불안들이었다. 오늘을 살아내면서 이게 미래에 어떻게 작용할까 걱정하며 하루를 버텨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끊임없이 평가받는다는 건 다르게 보면 끊임없는 기회가 온다는 것 아닌가. 실패한 과거를 후회할 필요도, 앞으론 기회가 없을 거라는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저 선배들도 지금 저렇게 환호하는데 말이다. 그냥 지금에 집중하며 살면 되는 거였다. 스쳐 가듯 읽은 한 구절이 생각난다.

  원수(예수)는 인간들이 현재 하는 일에 신경을 쓰기 바라지만, 우리(악마) 임무는 장차 일어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너의 지금을 살아라. 너무나도 뻔한 말이었던 문장이 어느새 위로가 되어 있었다.

박소정 기자 choco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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