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상상한다. 여느 연인들처럼 종두와 손을 잡고 길을 거닐며, 때로는 장난도 치고  종두에게 다정하게 노래를 불러주는 자신의 모습을. 그러나 지금 공주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종두의 등에 업힌 채 비틀어진 입술을 들썩일 뿐이다.

지난 9일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신인배우상 등 5개 부분의 상을 석권한 영화 『오아시스』는 뇌성마비 중증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공주와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전과 3범 종두, 두 주인공의 동화같은 사랑을 그리고 있다. 교통사고를 낸 형을 대신해 교도소에 들어간 종두는 출소한 후 피해자의 집에 사과하러 가서 그의 딸 공주를 만나게 된다. 그들의 관계는 종두의 강간 미수에서 시작됐지만 마술같이 사랑으로 이어지며, 공주를 위해 종두가 나뭇가지를 자르는 장면에서 그들의 사랑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뇌성마비와 전과자의 사랑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냉혹하다. 그들은 변변한 데이트 한 번 못하며, 온 가족이 모인 종두어머니 환갑잔치에서도 쫓겨난다. 심지어 그들의 사랑을 주위 사람들은 변태적 행위로 단정지어 버린다.

황량한 사막 속에서 생물이 존재할 수 있고, 죽음의 땅을 횡단하는 사람들의 타는 목마름을 적셔 줄 수 있기에 ‘오아시스’의 사전적 의미에는 ‘사막 가운데의 샘’이란 뜻 이외에 ‘삶의 위안이 되는 장소’라는 뜻을 더하고 있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공주와 종두가 보여주는 그들만의 오아시스가 바로 두 번째의 오아시스에 해당한다. 즉, 영화 속 두 주인공에게 있어 오아시스란 그들을 냉소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회 속에서 서로의 사랑으로 만들어 낸 달콤한 희망의 공간이자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된 공주와 종두가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 주는 안식처이다.

그러나 오아시스가 그것의 배경이 되는 사막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지구 표면의 70%나 되는 물로 이뤄진 오아시스가 사막의 보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둘러싼 사막이 그만큼 고통의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영화 『오아시스』 속에서 공주와 종두의 사랑이 더 애절하고 빛날 수 있었던 이유와 현실에서 사람들이 자신만의 오아시스를 꿈꾸며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 사회가 또 다른 사막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양은희 학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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