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찬 강사·고려대 교양교육원,
교육학 박사

  제도교육으로서의 문학교육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사회에 대한 인식을 공유·전달·강화·재생산한다. 그리고 교과서는 제도교육이 지향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상()을 구체적으로 확인 가능한 실체다. 해방 이후 모든 중등 교육과정은 교과서에 문학작품을 수록해 왔고 이때 문학작품의 선별과 수록은 국정제와 검정제라는 제도교육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져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교과서에 수록된 문학작품을 통시적으로 살펴보는 방법을 통해 제도교육이 형상화해온 상()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글은 중등 교과서에 수록된 개별 한국현대소설을 제도교육의 차원에서 파악하되 이를 교육과정이나 지배 이데올로기의 결과 또는 시대사의 일부로 환원하는 문제를 지양하고 개별 작품의 자율성과 내적 질서를 존중하기 위해 아버지 양상에 주목했다. 아버지는 근대소설의 기원과 성격을 설명하는 기준점이 된다는 점, 아버지에 대한 관념의 변화가 개인적·국가적 차원의 의식과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가 국가·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 양상을 살펴보는 일은 그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수록된 문학작품을 통해 제도교육의 지향을 읽을 수 있다.

 

  중등 교과서에 수록된 한국현대소설은 식민지기를 근대의 문제로, 한국전쟁기를 전쟁과 분단의 문제로, 산업화기를 산업화가 가져온 사회적 문제로 각각 형상화 해왔다. 그 중 산업화기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산업화로 인한 문제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아버지 긍정과 계승을 통해 보여준다. 첫 번째 유형은 도시개발의 문제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통해 비판한 것이다. 비루한 아버지에 대한 연민만큼 아버지를 힘들게 하는 도시개발 문제에 대한 비판은 보다 설득력을 얻는다.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는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경제성장이 필요하다는 개발 논리를 비판하고 그 이면을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 유형은 아버지의 전통예술에 대한 긍정을 통해 산업화 시대의 정신적 가치를 모색한 것이다. 판소리와 북이라는 아버지의 전통예술은 개발 논리의 이면과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성찰하게 하고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나타난다. 세 번째 유형은 아버지의 선()을 지향하고 계승하는 일을 통해 부정적인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권력과 개발 논리의 문제를 정의로운 아버지를 통해 비판하고, 아버지의 올곧은 정신이 후대로 계승될 것을 전망한다. , 인정의 대리 아버지를 통해 과거-고향을 낭만화하여 세태의 타락을 비판하고 산업화 사회에서도 간직해야 할 가치를 제시한다. 정의와 인정, 이상화된 아버지의 모습은 타락한 세태를 비판하고 반성과 성찰을 제공하는 동시에 다음 세대에게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를 살펴보자. <선학동 나그네>1979년 여름 <문학과지성>에 발표된 단편소설로, ‘남도 사람연작의 세 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이청준의 소설 중 대표적인 교과서 소설이며, <선학동 나그네> 자체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연작에서는 예술을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일, 부친 살해 등 민감한 내용들을 다룬다.

  소설은 소리꾼 누이의 종적을 쫓는 사내의 이야기다. 사내는 오래 전 늙은 소리꾼 의붓아버지와 어린 누이를 두고 떠났던 인물로,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어떤 한()을 품고 누이의 종적을 때때로 찾고 있다. 의붓아버지를 증오하는 사내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사내의 한과 누이를 찾는 이유 역시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사내의 한과 누이를 찾는 이유는 어린 누이를 두고 떠났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나 후회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내와 누이가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라는 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사내가 힘들게 누이의 종적을 쫓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선학동 주막에서 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추적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선학동은 법승의 자태를 닮은 산세를 가지고 있으며 마을 앞 포구에 밀물이 차오를 때 법승이 북을 치는 듯한 신기한 지령음(地靈音)이 들리는 곳이다. 밀물 위에 비친 관음봉의 산그림자가 마치 학이 나는 듯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관음봉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다고 믿어왔다. 이 믿음은 관음봉에 명당이 숨어 있다는 전설과 이어진다.

  그러나 간척사업으로 인해 관음봉의 그림자가 비치던 포구가 사라진다. 포구가 사라졌으니 밀물이 들어올 수 없고, 밀물이 없으니 관음봉의 그림자인 선학이 나는 모습 또한 더 이상 볼 수 없다. 밀물이 차오를 때 들렸던 신기한 지령음도 들리지 않는다. 선학이 나는 모습과 지령음이 사라졌기 때문에 관음봉의 명당에 대한 믿음도 서서히 옅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비상학의 모습을 통해 명당을 품은 관음봉의 상서로움을 믿고 살아왔다. 마을 이름도 산의 이름을 따지 않고 선학의 이름을 빌려 선학동이라고 정했던 것이다. 결국 간척사업은 관음봉을 평범한 산줄기에 불과하게 만들고, 마을의 근원(선학)을 없앤 셈이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넓은 들판은 마을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는 이익이 될 수 있다. 선학동의 간척사업 목적 자체가 들판을 만들어 농촌의 경제적 발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아늑하고 인자스런 지덕(地德)과 풍광을 잃는 것, 그것들의 아우라(aura)를 잃는 일이다. 주막집 아낙의 글씨, 우리 같은 길갓집 살림이야 고을 인심에 기대 사는 처진디, 들농사가 는다고 그런 인심까지 함께 늘지는 않는갑습디다라는 말처럼 간척사업을 통한 경제적 발전이 마을의 인심이나 풍속을 좋게 만드는 일과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이 날지 못하게 되면서 인심은 더 나빠진 것처럼 보인다.

  간척사업으로 잃어버린 지덕, 인심, 명당 같은 것들은 그 실물이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 정신적인 것에 속한다. 풍광 역시 경제적 득실로 곧바로 계산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간척사업의 결과는 실물로 분명하게 확인되는 토지의 증가다. 그러므로 선학동의 간척사업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 지덕, 인심, 명당과 같은 가치를 포기하고 명확하게 계산되는 경제적 이득을 우선한 것이다.

  <선학동 나그네>는 전통예술을 통해 경제개발 논리가 놓칠 수 있는 정신적인 것의 가치를 보여준다. 소설의 중심 사건은 누이에 대한 사내의 추적인데, 그 결과 오랜 시간이 지나 아버지의 유골을 묻기 위해 돌아온 소리꾼 누이가 간척사업으로 잃어버린 정신적인 것을 소리(판소리)라는 전통예술의 힘으로 되살려낸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라도 누이가 몰래 아버지의 유골을 묻고 떠날까봐 경계한다. 그러나 누이는 경계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막에서 계속 소리만 한다. 마침내 누이의 소리는 마을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밀물 때를 잡아 부르는 누이의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치 선학동이 옛날의 포구 마을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고, 간척사업으로 잃어버린 비상학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누이의 소리를 통해 이미 가물가물해진 비상학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누이의 소리가 보여주는 경지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은 이해타산을 잊는다. 암묵적으로 누이가 아버지의 유골을 암매장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누이가 아버지의 유골을 묻는 것을 지극히도 당연한 일처럼 생각하고 암매장을 마친 누이가 곧바로 마을에서 사라진 뒤에도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리고 주막 주인이 누이에 대한 앞뒤 없는 말을 할 때도 그러는 사내를 탓하려 들기는커녕 오히려 그와 어떤 믿음을 같이하고 싶은 진중한 얼굴들이 되곤한다.

  누이의 소리는 예술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간척사업으로 잃어버린 비상학의 모습을 심안(心眼)의 차원에서 다시 볼 수 있게 한다. 나아가 마을사람들이 이해타산을 떠나 누이의 상황을 납득하도록 하는 경지까지 가능하게 한다. 누이의 전통예술은 산업화로 잃어버린 것을 정신적 차원에서 복원하는 힘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누이의 소리는 아버지로부터 계승된 것이다. 아버지는 삼십 년 전 선학동 주막에 머무르며 어린 누이에게 소리를 가르친 적이 있다. 이때 누이의 아버지는 선학동 주막에 머무르면서 앞을 못 보는 누이에게 포구의 정경을 소리를 통해 심어줬다. 누이가 삼십 년 후 비상학의 모습을 소리로 되살려낼 수 있었던 것은 삼십 년 전 아버지의 전승 덕분이다.

  누이는 아버지의 전통예술을 계승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에게 다시 선학을 상상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마을 주변에 소리를 팔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어울리는 장소를 고집하는 모습이나 아배의 소리는 그러니께 그 시절에 늘 물 위를 날아오른 학과 함께 노닐었답니다처럼 누이의 아버지는 돈을 버는 일보다 소리 자체에 몰두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후 누이 역시 아버지처럼 소리를 예술적으로 추구하고 그 경지를 끌어올리는 일에만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누이는 소리를 듣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학동 학을 다시 날게 하여 아버지의 유골을 묻고 떠날 수 있었다. 누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소리가 다시 아버지의 안식처를 마련해준 것이다.

  관음봉의 의의가 명당으로 나타나는 것도 소설이 아버지의 것(소리)이 자식(누이)에게 계승되는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명당은 후손(아들)이 조상(아버지)을 편안하게 모시고, 다시 조상은 후손에게 땅이 품은 좋은 기운을 전해준다는 믿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효()가 후손에게 복()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소리를 계승하는 일은 아버지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마을 사람들에게 개발로 인해 잃어버린 선학을 다시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누이가 아버지의 전통예술을 계승하는 것은 그녀와 사내의 한을 푸는 일이 된다. “차마 그 원망스런 의붓아비를 죽여 없앨 수가 없어서떠났던 사내는 누이가 보여준 소리의 경지를 전해 듣고 한을 일부 해소한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사내는 선학동을 다시 찾으며 여자의 한스런 후일담을 예상했다. 사내는 여전히 누이를 떠난 일에 대한 죄책감과 정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누이 역시 자신처럼 이러한 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이제 이 선학동 하늘에 떠도는 한 마리 학으로 여기 그냥 남겠다 하시오처럼 누이는 아버지의 소리를 계승함으로써 한을 해소했다는 후일담을 듣고 사내는 더 이상 누이의 종적을 찾지 않겠다고 말한다. “언제부턴가 백학 한 마리가 문득 날개를 펴고 솟아올라 빈 하늘을 하염없이 떠돌고 있었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사내의 한이 여자의 이야기와 사내 자신의 소리를 통해 일부 해소되었거나 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선학동 나그네>는 예술을 통한 한의 승화, 또는 한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예술의 힘은 산업화로 인해 잃어버린 정신적인 것들, “죽었던 학을 정신적 차원에서 다시 날아오르게 한다. 포구가 사라지고 들판이 생긴 것처럼 개발은 현실이며 다시 개발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의 전통예술의 힘, 전통예술을 계승하는 일은 선학동 마을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개발 이전의 마을에 대한 기억을 복원시키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전통예술과 그 계승은 경제 개발 과정에서 잃어버린 정신적인 것을 되살려내고, 개발이 우선시되는 시대에 또 다른 중요한 가치가 존재함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 본고는 김학찬 (2020), <중등 교과서에 수록된 한국현대소설의 아버지 양상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에서 내용의 일부를 발제하였습니다.

 

  KU연구실 너머

  모든 이야기는 아버지에 대한 것이 아닐까, 계속 의심해 왔습니다. 아버지는 강력하고, 강력하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며, 유혹적이지만 어쩐지 반발감이 드는 무엇이니까요. 약한 아버지라고 해도 방향만 다를 뿐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의문이 하나. 제도교육으로서 소설교육이 상상해온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이 둘. 그러나 소설교육도 역시 충실한 소설읽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 셋. 은퇴하신 오탁번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목적에 따라 소설을 거칠게 대하는 건 나비를 몽둥이로 잡는 꼴입니다. 소설교육의 장을 해석하되 나비를 존중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더 읽을 자료는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과 우에노 치즈코의 <근대가족의 성립과 종언>, 강진호의 <국어 교과서의 탄생>을 차례대로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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