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항에서 300kg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죽은 ‘이선호 노동자의 죽음’과 한강에서 실종된 지 5일 만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 ‘한강 의대생 사망 사건’에 온 사회가 애도하고 있다. 20대 초반 꽃다운 나이의 두 청년의 죽음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사건이지만, 두 청년의 죽음이 사회에 던지고 있는‘죽음의 계급화’라는 주제는 두 청년의 죽음을 그저 슬퍼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1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비슷한 나이, 1주일도 차이 나지 않는 비슷한 시기. 그러나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였던 이선호군의 죽음에 비해 의대생이었던 손정민군의 죽음에 쏟아진 대조적인 언론의 관심과 조명은 ‘죽음의 계급화’라는 화두를 던지며 청년의 죽음에 마저 내려앉은 ‘계급사회’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죽음의 계급화’가 단순히 몇몇 언론들의 문제가 아닌, 언론이라는 부분을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 전반의 모습이라는 데에 두 청년의 죽음이 더 살갗에 와닿는 이유가 있다. ‘산업재해로 인한 청년 노동자의 사망을 다루지 않는 언론’이 있는 사회에선 매년 2000여 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고 있고, 수많은 학생이 ‘더 나은 직업’을 쫓아 인생의 절반을 책상 앞에서 경쟁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선호 노동자의 죽음, 나아가 노동자들의 죽음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이선호들’의 문제이자 ‘손정민들’의 문제이다.

  ‘죽음의 계급화’라는 벽을 허물기 위해서 한 가지 더 던지고 싶은 화두는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이다. 두 죽음에 대한 우리의 판이한 반응이 계급적이라는 것을 짚고 그런 불평등에 맞서 싸우려는 것은, 의대생과 싸워 의대생의 권한을 빼앗거나, 의대생의 죽음 또한 주목받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의대생의 죽음 ‘역시’ 당연하지 않은 ‘노동자가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더는 어떠한 청년도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죽음의 계급화’를 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같은 노동자를 계급화하려는 사회에 맞서야 한다.

  제국의 황제였던 카이사르는 식민지를 더 수월하게 지배하기 위해 ‘나눠서 지배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2000년도 더 지난 ‘지배자’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는 오늘이다.

 

서형훈(공과대 전기전자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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