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때 갈색 털을 가진 너를 처음 만났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잘 걷지도 못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말 그대로 같이 자랐다. 어린 내가 투정을 부릴 때마다 너도 따라서 칭얼거리곤 했다.

  12년이 흐른 지금, 어느새 흰 털이 늘어 진한 밤색이 흐릿해졌다. 잠을 자며 부쩍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물혹이 만져질 때, 노령견 수술 동의서를 처음 쓰던 순간. 그때마다 혼자 이별을 상상해보지만 쉽지가 않다.

  할머니가 된 너를 볼 때면 문득 부모님의 나이를 실감한다. 작년 아빠에 이어 내년에 앞자리가 바뀌는 엄마의 나이를. 꽃샘추위가 계속되던 3월의 이른 봄에도 엄마는 유난히 더워했다. 이따금 아빠를 카메라에 담는 순간, 흘러간 시간의 흔적이 부쩍 선명할 때면 당신께 보여주지 않고 사진을 지우곤 한다. 주름은 인생의 눈물 자국이라던데, 부모의 짙어지는 주름을 보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의 10대는 참 어두웠지만, 당신은 나로 인해 몇 곱절은 더 짙은 어둠 속에서 중년을 시작했다. 엄마는 웃기보다 참 많이 울었다. “힘든 건 내 자윤데 왜 맘대로 불행하지도 못하게 해.” 나의 불행이 곧 당신의 불행이 된다는 것을 그때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해서일까. 그제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친구와 수다를 떨다 부모님 이야기가 나왔을때, “우리 엄마가까지 말한 채 왈칵 눈물이 쏟아졌던 그 밤이 생각난다.

  정말 아끼는 마음엔 늘 미안함이 붙어 다닌다.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그만큼 지금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기억이 추억이 되고, 삶이 영화가 될 순간들을 부모님께 선물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딱 내 나이인 스물둘의 엄마와 스물셋의 아빠가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왠지 낯설지 않다. 당신을 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다고, 신께 덤을 얹어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들리지도 않을 쑥스러운 소망을 젊은 당신께 전한다. 그리하여 엄마의 손을 잡은 채 아빠의 팔짱을 끼고서 다시 걷겠다며, 당신의 추억을 시간 속에 갈피처럼 꽂으며 되뇌인다.

 

이다연 기자 idaye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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