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 우리에게 그는 인간의 위대함을 웅변하는 인물로 기억된다. 그가 무려 30여 년 가까이 무인도에 혼자 지내면서도 인간의 자존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작가 다니엘 디포우(Daniel Defoe)가 이 인물의 무인도 행적을 통해 서구 근대사회에 대한 비판을 역설하고자 하였다는 것, 이러한 점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동시에 로빈슨이 위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문명의 힘에 있었다는 사실은, 작가의 비판적 정신이 결국 어쩔 도리 없이 서구 근대 문명의 가치를 승인하는 지점으로 환원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자, 근대주의의 오만함에 다름 아니다. 험프리 리차드슨(Humphry Richardson)의 『로빈슨 크루소의 성생활』은 원작이 지니고 있는 그와 같은 결정적 한계 지점, 그 중심을 공략한다. 원작이 눈을 감고 싶어했을지 모르는 인간 존재의 아킬레스건인 성적 욕망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로빈슨 크루소에 씌워진 신화의 구조물을 해체하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심문한다.

혜화동 1번지 3기 동인이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마련한 페스티벌, 그 첫 번째로 올려진 『로빈슨 크루소의 성생활』(극단 「신기루만화경」, 2002.9.5~15)은 험프리 리차드슨의 그와 같은 문제 의식을 연극화(동이향․이해제 각색, 이해제 연출)한 것이다. 50여 명만이 빼곡히 앉을 수 있는 소극장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성생활』을 가까이 지켜보는 동안, 관객들은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문명화된 인간이 비문명화된 세계에 적응할 수 없는 비극을, 홀로 남은 자에게 떠오르는 성적 환상과 동식물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비인간적’ 초라함을, 그리고 그의 이러한 성생활이 본능적 욕구만이 아니라 인간의 절대 고독을 넘어서기 위한 몸부림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을 꼭지점으로 하여 인간과 자연과 문명으로 이루어진 이 삼각뿔로부터, 우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과 역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연극은 어떠한 비젼도 산뜻하게 제시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연극은 찬란한 인간 문명 속에 감추어진 인간 존재의 음울함을 환기시킬 뿐이지만, 이러한 솔직함이 이 연극의 미덕이다.

이 공연이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유행처럼 번진 섹슈얼리티와 같은 미시적 담론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의 연장선에 놓이기는 하지만, 지극히 현대적 시각이라 할 수 있는 그와 같은 패러디를 한국 연극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전의 재해석이라는 의도 아래 올려진 많은 공연들로부터 별다른 재해석을 만날 수 없음이 다반사임을 고려할 때, 이 연극은 분명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동물농장』을 ‘RED’ 즉 ‘욕망’에 초점을 두고 무대화한 『RED-동물농장 프로젝트Ⅱ』(극단 「상상」, 2002.9.6~22)는 결과적으로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원작이 주조하고 있는 틀을 비틀어야 하지만, 『RED』는 그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욕망을 말하고자 했다면 나폴레옹의 권력에의 욕망(부차적으로, 몰리의 욕망)뿐만 아니라 그에 공모하는 집단적 개체들의 욕망을 성찰해야만 했다. 역사에 대한 책임을 한 개인이나 구조에 환원시킴으로써 자신에게는 면죄부를 발급하는 것은 어떠한 비젼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RED』는 오웰 시대의 역사적 계기와 현재적 관심사를 연결시키는 데는 실패하였다. 『로빈슨 크루소의 성생활』이 최선의 대안일 수는 없겠지만 이 연극에 호감을 가졌던 것도 『RED』가 해결하지 못했던 점을 성취하였다는 데 있다. (리차드슨의 패러디 소설에 힘입은 바 크지만) 널리 알려진 디포우의 원작을 현재적 관심사와 결부하여 사유하고자 한 연출의 힘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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