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묘하지만 매력적인 ‘베이퍼웨이브’에 스며들다
오묘하지만 매력적인 ‘베이퍼웨이브’에 스며들다
  • 이현민 기자
  • 승인 2021.07.24 16: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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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조 베이퍼웨이브(Vaporwave) 탐구

정의하기 힘든 모호한 장르

젊은 세대에 트렌디함으로 어필

관객이 해석하며 완성해가는 음악

 

  본격적으로 과제를 시작하기에 앞서 좋아하는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감상한다. 화려한 색감의 화면 위 폭죽이 터지고 여러 명의 가수가 등장해 춤을 춘다. 이번에는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피드를 훑어본다. 분홍색 배경 위에 석고상, 야자수, 각종 외국어가 난잡하게 널려있는 빈티지 샵의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유튜브에 들어가 오늘의 노동요로 들을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반복되는 애니메이션 움짤과 함께 요즘 유행한다는 시티팝이 지직거리며 흘러나온다.

  ‘베이퍼웨이브(Vaporwave)’는 과거의 것을 조악하게 짜깁기해 사람들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예술 사조다. 80·90년대 문화적 요소의 콜라주, 기괴하고 저질인 디지털 이미지를 대표로 하는 베이퍼웨이브는 수용자로 하여금 익숙하면서도 낯선 양가적인 정서를 느끼게 한다. ‘유소닉이라는 활동명으로 유튜브 채널 서울시티비트를 운영하는 가수 유상훈(·37) 씨는 베이퍼웨이브는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무궁무진한 매력을 갖고 있다고 소개했다. 베이퍼웨이브적 요소는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여전히 생소하게 느껴진다. 기묘하고 이질적이지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베이퍼웨이브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 봤다.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쉽게 베이퍼웨이브 스타일을 구현할 수 있다. 기자가 직접 베이퍼웨이브 이미지를 만들어봤다

 

  경계 없는 과거로 현재를 재구성하다

  베이퍼웨이브는 2010년대 초반, 지금은 유행이 지난 음악을 실험적인 방식으로 샘플링하는 전자음악의 형태로 등장했다. 미국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됐고, 국내에는 2013년경 들어왔다. 이후 각종 광고와 그리스 흉상, 전각 문자 등이 무질서하게 배치된 이미지인 에스테틱(a e s t h e t i c s)’과도 결합하며 초현실적인 특유의 베이퍼웨이브 스타일을 형성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성장한 베이퍼웨이브는 익명성과 모호함을 전제한다. 다수의 베이퍼웨이브 아티스트는 인터넷상에서 활동하며 나이, 성별, 정체성 등에 구애받지 않는다. 시각문화 연구자 이하림(·29) 씨는 생경한 그리움: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잔재의 이미지논문을 통해 베이퍼웨이브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베일에 싸인 아티스트들은 서로 다른 기원과 지역성을 띤 요소들을 마음껏 조합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다고 말했다. 베이퍼웨이브는 각각 다른 시공간의 이미지를 현재의 미적 경험으로 제시하며, 관객들의 무의식에 잠재돼있던 상실감과 욕망을 자극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경험한 적 없는 노스탤지어를 느낀다.

  초기 베이퍼웨이브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정신을 담고 있었다. 서구권에서는 가치를 잃어버린 과거의 대중문화를 떼어와 재구성해 자본주의의 허무함을 비판했다. 예를 들면, 베이퍼웨이브의 세부 장르 중 하나인 몰소프트1980년대 자본주의의 상징인 쇼핑몰에서 배경음악으로 쓰이던 경음악을 가져와 공허함을 부각했다. 2013년 이후에는 베이퍼웨이브 스타일이 사람들에게 점점 호응을 얻으며 대중적인 분야로 자연스럽게 확대됐다. 패션 브랜드의 광고나 유명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등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보편화됐다. 이에 일부 팬들은 자본주의의 흐름 안으로 들어갔다고 지적하며 베이퍼웨이브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이하림 씨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추구하는 방향성은 변했지만, 베이퍼웨이브가 가진 예술적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도태된 가치에 주목해

  옛것을 차용해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베이퍼웨이브와 레트로는 혼동되기도 한다. 김지원 작가는 베이퍼웨이브와 레트로가 추구하는 가치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레트로나 뉴트로는 과거의 호시절을 화려하게 가공해 사람들의 동경을 이끌어내지만 베이퍼웨이브는 의도적으로 조악함을 표방해 관객들이 상실감을 느끼게 한다. 김지원 작가는 베이퍼웨이브 스타일은 획일화된 아름다움의 기준과 가치에 물음을 던진다“‘가 아닌 를 추구하는 반문화적 성격을 띤다고 설명했다.

  차용하는 과거의 이미지에도 차이가 있다. 레트로가 뚜렷한 옛것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관객의 향수를 자극한다면, 베이퍼웨이브는 과거를 이루던 흐릿한 단서들만을 보여준 채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준다. 레트로는 영감의 대상이 되는 시기가 뚜렷하고 구체적인 대표성을 지닌 대상으로 과거를 재현한다. 드라마 응답하라시리즈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베이퍼웨이브는 흐릿한 분위기들의 집합에 의존해 모호함을 극대화한다. 때문에 작품의 소비와 감상에 있어 관객의 역할이 확대된다. 이하림 씨는 관객이 작품을 보고 스스로 그 시절 언저리의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고민하는 과정도 작품의 일부라며 베이퍼웨이브의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 경계는 희미하다고 전했다.

 

  다양성 넓혀가며 미래로

  현대의 베이퍼웨이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트렌디한 감성을 가미하며 특유의 한 매력으로 젊은 세대의 취향을 저격하고 있다. SNS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세대가 이전엔 없었던 참신함에 매력을 느꼈다는 게, 김지원 작가의 진단이다. 그는 마케팅 분야에서의 베이퍼웨이브는 세련된 모습만을 지나치게 부각하던 기성 광고의 풍토를 꼬집는다꾸며내지 않은 솔직함이 MZ 세대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현대적인 베이퍼웨이브 스타일을 구현하는 작가 맜살로 활동하는 A씨도 젊은 세대 사이에서 베이퍼웨이브가 힙하고 매력적인 가치로 향유된다고 밝혔다.

  기존의 베이퍼웨이브 스타일은 대부분 시티팝이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일본 문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일본의 대중문화가 당대를 풍미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국의 문화를 베이퍼웨이브 작업에 이용하는 경우도 증가하는 추세다. 미국의 그룹 ‘Death's Dynamic Shroud’는 케이팝을 차용한 한글 제목의 베이퍼웨이브 음악을 업로드했다. 한국 걸그룹 A.O.A의 노래를 샘플링한 너 땜에 맘이 맘이 맘이 괴로워요라는 노래를 들으며 국내 팬들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감정을 느낀다. 유상훈 씨는 다양한 시도로 인해 케이팝이 가진 음악성이 재조명됐다고 전했다.

  전 세계가 공통으로 향유하는 문화가 늘어나며, 베이퍼웨이브가 그 시대의 관객에게 공통으로 주는 감흥도 살필 수 있게 됐다. 이하림 씨는 베이퍼웨이브가 반영하는 당대 사람들의 무의식과 욕망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이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민 기자 never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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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 2021-08-10 11:48:02
에스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