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엔 더더욱 학교에 가기 싫었다. 억지로 열람실에 갔지만, 그냥 멍 때리는 시간도 많았다. 한국에서의 인생은 끝없는 시험 한탕주의라며 비관하면서도, 미래의 나를 위한 것이라고 위로했다. 이렇게 투덜대는 동안 학교에는 투명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쓰는 책 걸상을 치워주는 분들. 열람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 중에서 이들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2019년 서울대에서 창문 없는 지하 휴게실에서 노동자가 숨진 사건이 있었다. 그 2년후 휴게실에서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비극적 사건을 두고 엉뚱하게 대립하고 있다. 무의미한 시험을 봤다던가 교직원이 갑질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몇몇 정치인들은 잠깐 학교에 찾아가 줄 뿐이다. 세 번째 비극을 막기 위한 해법과 대책을 강구하고, 노동자의 근무 강도, 건강 관리는 제대로 이뤄지는지 살피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얼마 전 서울대학교 대나무숲에 ‘서울대 청소 노동자의 기회비용’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서울대의 청소 노동자가 열악한 직장을 계속 다니는 건, 학교 바깥이 더 안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청소 노동자들, 글쓴이의 말로 경제학의 ‘문외한’들은 각자 다른 진로를 선택할 기회비용을 포기하고 어려운 노동 환경을 스스로 감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열악한 노동 환경을 마주한 저마다의 사정을 간과한 것도 문제지만, 이들이 우리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임을 잊어버린 태도에 화가 났다. 그런데 나 역시 그와 다를 게 있나. 학교를 오가는 동안 청소 노동을 도와드린 적도 없거니와 책상 앞에 앉아 투덜거리기만 했으니, 나한테도 이분들은 투명인간이 었다.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책으로만 세상을 배워온 나는 세상 볼 줄 모르는 문외한이다. 내가 깨끗한 책상에 앉아있는 사이, 사람들이 분노와 연민을 주고받는 사이, 내 옆의 진짜 사람들 을 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서로를 동등하게 바라보고 동행할 수 있는 기회. 이게 내가 그리고 우리가 놓친 기회비용 일 것이다.

 
 
김민재 기자 flowe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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