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초반을 주름잡은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202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게임이다. MMORPG의 전성기가 한풀 꺾였다고는 해도 클래식 버전의 리부트가 성공하면서 많은 직장인들을 다시금 아제로스로 불러들이는 기염을 토하며 여전히 노병은 쉽게 죽지 않음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호드와 얼라이언스라는 두 진영의 대립은 주로 던전 공략과 아이템 파밍이 중심인 게임에 나름의 설득력과 일관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단순히 어떤 종족의 누가 있었다라는 제시에 머물지 않고 게임의 세계관은 그 속에 살아가는 여러 부족들의 역사까지를 포함하며 플레이의 당위를 만들어낸다.

  수많은 종족 중 호드 소속의 트롤이라는 종족은 특히 흥미로운 집단이다. 호드의 일원으로 자리하고 있는 검은창 트롤이라는 부족은 오랫동안 아제로스 대륙에서 살아온 이들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부족의 힘과 영토를 잃고 나가와 같은 적들에게 쫓겨 변방 구석의 섬에 사실상 갇히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절멸의 위기에 마주한 트롤은 호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오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이를 통해 호드라는 연합의 일원이 된다. 숫자도 적고 힘도 약한 데다가 취향이나 외모, 신앙도 (무려 부두교를 믿는 종족으로 나온다) 매우 특이해 게임 속에서 여러모로 구박받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트롤은 당당한 호드의 일원으로 연합 회의에 참가하며 심지어는 호드 연맹의 최고 지도자인 대족장을 배출하거나 대족장의 참모직을 수행하는 등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차지해 왔다.

  비단 검은창 트롤뿐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위기에 몰린 상태의 많은 부족이 유사한 방식을 통해 호드의 일원이 되는 모습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또 다른 주요 세력인 타우렌 또한 켄타우루스의 침공에 고향을 잃고 밀려났을 때 호드에 찾아왔다. 심지어는 아예 한 번 죽은 뒤 시체로 다시 일어난 언데드들 또한 자신의 의지를 찾은 뒤 호드에 의탁하며 연맹의 일원이 되었다.

  호드라는 집단의 정체성을 만드는 중요한 공통점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난민일 것이다. 호드의 깃발 아래 모인 이들은 대체로 원래 살던 고향을 잃고 쫓겨난 상태다. 심지어 중심인 오크 또한 사악한 힘에 휘둘려 아제로스까지 넘어오게 되었지만 힘으로부터 해방된 뒤에는 사실상 고향 잃은 난민에 가까운 정체성을 가진다. 종족 절멸의 위기를 넘어 살아남은 이들이 모인, 호드라는 깃발은 일종의 난민 공동체다. 칼림도어의 황무지를 개간해 아제로스에 정착한 이들은 계속 또 다른 난민 무리들을 자신들의 깃발 아래 받아들이며 점차 거대한 공동체로 성장해 나가며, 이 확장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속 이야기 진행의 주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정주민을 대변하는 얼라이언스 측도 자세히 살펴보면 또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기계조작에 능한 노움 종족 또한 기계들의 반란으로 자신들의 수도 놈리건을 잃고 얼라이언스에 망명해 오며, 확장팩에서 합류하는 드레나이 종족은 아예 종족명 자체가 추방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매 확장팩마다 새롭게 추가되는 종족들의 상당수가 고향을 잃은 난민이라는 이야기가 게임 속 주요 등장 세력들의 공통적 배경이 된다는 점은 그리 잘 알려진 내용은 아니다. 그렇지만 갈수록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얽혀 사는 환경으로 변화하는 한반도에서의 삶들을 생각할 때 적지 않은 생각거리들을 던져주기도 한다. 생김새도, 가치관도, 신앙과 문화도 모두 다른 이 여러 종족들이 각기 호드와 얼라이언스라는 이름으로 모여 사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것은 현실에서 피부색만 달라도 난리가 나는 모습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경혁 게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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