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없던 시절, 광화문 광장은 휴일이면 함성과 구호로 가득 차고는 했다. 법정기념일이면 넓은 세종대로가 인파와 불규칙한 꽹과리 가락으로 채워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학생의 날을 맞아 친구들과 단체로 학생인권 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정작 학교에선 잘 입지 않던 빳빳한 마이까지 풀장착하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그날 그 자리에는 나처럼 교복을 입은 학생부터 대학생, 대학거부자, 학교 밖 청소년, 학부모 등 300명가량이 모였다. 행렬을 따라 세종대로에 들어서니 그 규모는 훨씬 커졌다. 그날 그곳으로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구호를 외쳤고 같은 요구안을 읽어나갔다.

  그런데 집회현장의 중심부에서 살짝 벗어나자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여기저기서 신문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참가자들이 눈에 띄었다. 참가자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중심부에서 들리던 통일성 있는 구호와는 달랐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구호를 외쳤어도 사안을 바라보는 생각은 저마다 다른 기억과 서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각자 지키고 싶은 것들도 전부 달랐다.

  최근 언론의 잘못된 청년 소비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청년세대를 키워드로 하는 보도량이 올해 4월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급증했다고 한다. 특히 이대남’, ‘이대녀라는 키워드들이 부각됐다. 영역별로는 정치 보도 비중이 30%를 넘겼다는 통계도 나왔다. 기사의 상당수는 2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 할당제등 일자리 분야에서 또는 젠더 담론에서 갈등을 빚는 내용이었다. 이게 과연 그럴까? 얼마 전 한 대학에서는 <현실에서는 평범한 대학생인 내가 언론에서는 이대남?!>이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이대남’, ‘이대녀로 구분될 수 없는 청년세대를 구태여 구분하는 태도는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외침이었다.

  오늘날의 청년층에 특별한 세대적 정체성이 있으리라고 믿는다면 도리어 문제의 본질을 감추는 일이다. 한 사안을 바라보는 사람 삼백이 있다면 삼백 개의 의견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생각은 섬세하고 예민해서 개인들의 입장은 결코 무 자르듯 나누어 규정하기는 어렵다. 더 선명한 태도를 강요하는 당신의 잣대에 대해 오늘도 나는 비켜 선다.

 

박다원 기자 wonda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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