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기자 할 거야?” 신문사 일에 허덕이는 나를 보며 주변 지인들이 묻곤 한다. “글쎄다”라는 고민 섞인 말엔, “그럼 왜 해?”라는 반사적인 물음과 핀잔 섞인 답이 돌아온다.

  그러게, 이걸 왜 하고 있을까. 언젠가부터 하고자 하는 일엔 그럴듯한 이유와 해야만 하는 명분이 배치돼야 했다. ‘이 대학의 이 학과’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수천 자로 채워 넣길 요구받던 시절부터,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맞춰 모습을 꾸며가는 데에 익숙해져서일까. 쌓아가는 경험 하나하나가 스펙이 되는 시기, ‘왜 하냐’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을 때 방황하곤 한다. 

  졸업하기 전까지의 남은 시간을 재보며 학기 계획을 세워 본다. 3학년 땐 학회, 4학년 땐 인턴을 해 봐야지. 당장 해볼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딱히 끌리지 않는 분야의 대기업 대외활동들을 물색해 본다. 언제나 골치 아픈 건 ‘지원동기’다. 내가 이 일에 얼마나 적합한 사람인지 구구절절 변명한다. 관심사가 넓고 얕아 벌여놓은 일은 많지만, 굵직한 경력 한 줄이 될 만큼의 성과는 적었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작은 일들을 늘려가기엔 시간이 촉박하게 느껴졌다. 이젠 남보다 나를 설득해야만 하는 강박이 생겼다.

  취재를 위해 광주에서 활동하는 청년 연극인을 만난 적이 있다. 무대를 한 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지원금을 받으러 고군분투하는 그는 누구보다 연극에 진심이었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훗날 연극인으로 살 마음은 없다고 했다. 문득, 나 또한 “그럼 왜 하세요?”라는 물음이 입에 맺혔다. 나중에 연극을 할 것도 아닌데, 연극 문화가 생소한 지역에서 돈과 시간을 들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냥 재밌어서요.” 돌아오는 대답은 그러했다. 그가 하는 일에 이유를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던진 ‘왜 하냐’에 대한 물음은, 내가 놓아버린 순수한 열망에 대한 질투 섞인 의구심이었다.

  젊은 날의 경험이 자산이라고 하지 않았나. 대가를 얻지 못하는 일엔 왜 ‘삽질’한다고 태그를 붙일까? 알 수 없는 미래에 쫓겨 좋아하는 것들을 잊고 살고 싶지는 않다. 내일의 일들을 고민만 하며 보내기에는 여전히 어린 나이, 조금만 더  ‘삽질’하며 부딪히고 싶다.

 

이주은 기자 twowee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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