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훈 문과대 교수·한국사학과
강제훈 문과대 교수·한국사학과

  문과대학은 본관의 서쪽에 있어 서관이라 통칭한다. 서관의 더 서쪽에는 한때 농구장이 있었다. 비탈면 바닥에 조성된 농구코트는 건물보다 한참 아래쪽에 자리잡았고, 잔디가 듬성듬성 심어진 관중석은 흙바닥이 드러나서 편히 앉기는 어려웠다. 필자가 가까이 한 공간은 아니었다. 하루는 강의를 마치고 지나가는데,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문익환 목사가 연설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인사라니 20대의 호기심에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았는데,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설득력 있는 논리를 차분하게 전개했다는 인상만 남았다. 연설 말미에 ‘늙은 나는 죽고 너희는 살아야 했는데.’ 하더니, 아무개야!, 아무개야! 한 사람 한 사람 민주화 운동으로 죽은 젊은이들 이름을 불렀다. 대학생, 노동자, 강제 징집자. 안타까운 사연도 덧붙였다. 순간 숙연해졌다. 나이 든 목사의 ‘아무개야’ 외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궜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어둠이 내렸고, 그날 어둠이 민망함을 가려준 것이 필자만은 아니었다. 

  선조 임금은 여건이 좋은 왕이었다. 그가 공부 자리에서 만난 첫 스승은 이황이었다. 이황이 죽은 다음에는 이이가 그 자리를 이었다. 늙은 이황은 생의 마지막에 <성학십도>를 저술하였는데, 그림을 곁들여 성리학의 정수를 설명했다. 젊은 왕이 바른 삶과 통치를 실현하도록 평생의 지혜를 갈무리한 역작이었다. 그래도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다른 스승 이이는 <성학집요>를 작성하였다. 혹여나 어려울까 되도록 쉽게 설명하고자 정성을 다했다. 임금이 만난 스승들은 역사에서 기억되는 가장 뛰어난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그들은 임금이 성리학에 관심이 깊으니 특별한 업적을 이룰 것을 기대하였다. 임금은 정치적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선택에 주저하지 않았다. 전쟁을 겪었으니 더 그랬을 것인데, 위대한 학자 스승이 꿈꾸던 성군과는 한참 거리가 먼 임금이 되고 말았다.

  세종은 여건이 좋은 임금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즉위한 임금에게는 왕위 계승 서열이 앞선 형이 둘이나 있었다. 큰형은 서울 인근에서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사냥을 일삼았다. 신하들은 정치적 위협이니 제거할 것을 거듭해서 간언했다. 아버지 태종은 왕권 안정을 명분으로 외가와 처가를 몰살하다시피 정리하였다. 세종은 유교적 이상 정치를 추구했다. 그러나 불교가 밑바닥까지 스며든 사회 환경은 임금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하나같이 장애가 되었다.

  그는 신하들의 집요한 요청을 거부하면서, 마지막까지 형의 돌출을 용인했다. 외가와 처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데도 세심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하였다. 조회는 국왕과 신하가 만나 선한 통치를 다짐하는 의례였다. 한 달에 세 번 열기도 어려우나, 세종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여섯 번의 모임을 정례화했다. 그러다 다스림에 하루도 방심할 수 없다고 하여, 매일 할 것을 정했다. 이때부터 임금과 신하는 매일 새벽에 모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를 다짐하며 일과를 시작했다. 임금이 죽었을 때, 신하들은 동방의 요순(堯舜)이라 평가했다.

  한 번쯤 진심이 담긴 선한 결심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한 결심이 매일 실천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세종이 좋은 군왕이었다고 누구나 알고 있다. 많기도 많은 그의 업적이 한결같았던 하루를 30년간 축적한 결과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까? 15세기는 정적들을 쉽게 죽이던 시대였다. 왕권을 위협하는 정치적 장애물을 계속 용납하는 것이 결과처럼 쉬웠을까? 부왕 태종이 죽은 해에는 역사상 흉년이 들었다. 모처럼 친정에 임해야 했던 세종은 가장 참혹한 자연재해로 자신의 통치 첫해를 보냈다. 그런 그에게 이상적인 군왕이었다는 평가가 당대에 이미 내려졌다.

  대학의 일원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데 왜 선한 결심이 없겠는가? 팬더믹 속에 대학 시절의 한 해, 두 해를 보낸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좋은 환경이 선한 결과를 담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전적인 여건이 선한 결과로 이어진 경우가 많다. 진심을 담은 결심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선한 결심을 매일매일 실천하는 것이 진짜 어려운 도전이다.

  나중에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을 만나러 북으로 갔다. 젊은이가 흉내낼 수 없는 열정으로 민주와 통일을 향한 결의를 실천했다. 그의 방북은 통일 담론을 뜨겁게 달궜지만, 고령의 노인은 결국 투옥 됐고, 다섯 해쯤 지나 소천했다. 필자는 문 목사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서관 농구장의 기억과 겹치며, 나이 든 분의 구속을 안타까워했다. 서관 농구장에는 국제관이 들어섰다. 고려대의 발전과 다양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 앞을 지날 때면, 목사님의 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너는 살아야 했는데!’ 

  서관 농구장이 새삼 그립다. 잔디조차 제대로 메워지지 않은 맨 흙의 투박함에, 뭐라도 결심할 수 있었고,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매 순간이 소중했는데, 빚만 지고 산 거 같다. 선의는 실천으로 진정성을 드러내는 법! 가끔 반문해 본다. ‘잘 살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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