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

 

  뉴욕 상류 귀족 출신의 이디스 워튼은 대중 독자의 취향에 영합하지 않고 순수문학의 길을 걸은 최초의 미국 여성작가로 평가된다. 그녀가 태어난 존스 가문은 뉴욕의 명문가 중에서도 명문가로 꼽힌다. 상류 사회에서 “존스 가문과 발을 맞춘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녀의 집안은 유명했다. 당시 미국의 상류 귀족계층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정숙한 부인’과 ‘자애로운 어머니’ 두 가지였다. 여성이 글을 쓰는 일은 예술 활동이 아니라 일종의 노동이었다. 더군다나 시(詩)도 아닌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육체노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워튼은 뉴욕의 상류사회를 풍자하는 풍속소설인 <순수의 시대>(1920)로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이선 프롬>(1911)과 <여름>(1917)은 미국문학사에서 ‘자연주의 소설의 정수’로 자리매김했다. 

  워튼은 자연주의 경향을 따르지만 인간을 단순히 유전과 환경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로만 보지 않는다. 그녀는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작품의 주제로 형상화했다.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다른 자연주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유전과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들은 결정론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다. 하지만 그들은 결정론의 장벽을 박차고 나서지는 못해도 최소한 자신들의 그런 처지를 인식 한다. <이선 프롬>에서 이선은 엔지니어나 화학자가 될 충분한 자질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적 환경은 그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낡은 폐선’처럼 살아간다. 그는 아주 잠깐 매티와 서부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꿈을 품어보지만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제도나 규범, 도덕적 인습이나 윤리적 전통과 맞서 싸운다. 결과론적으로는 실패하고 포기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지만 말이다.

  줄거리로만 보면 <이선 프롬>과 <여름>은 각각 ‘한 남자와 두 여자’, ‘한 여자와 두 남자’ 사이의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로 도식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선 프롬>과 <여름>은 사랑의 방점이 ‘낭만’이 아니라 ‘격정’에 찍혀있다. 만일 <이선 프롬>과 <여름>이 워튼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읽는다면 아마도 적지 않은 독자들은 ‘막장 드라마’ 혹은 ‘불륜의 서사’로 폄하할 것이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작품은 ‘예술’로 불리고 또 어떤 작품은 ‘외설’로 불린다. <이선 프롬>과 <여름>도 소재로만 본다면 소위 ‘막장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미국 문학에서 ‘자연주의 소설의 정수’로 꼽힌다.

  그렇다면 예술과 외설의 기준은 뭘까? 개인적인 생각에 그 기준은 소재가 아니라 방법이다. 즉 예술에서는 다루어지는 소재가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냐’라는 것보다도 그 소재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 소재를 다루는 방법이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가른다. 게다가 그 방법이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에 따라 예술적 진심이 통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한다.

 

윤정용(초빙교수·세종캠 글로벌학부)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