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의 사람들이 나머지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당장 다들 탈출에 나설 조건은 아니기에 그 자리에서 기간 미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치자.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서로를 대하게 될 것인가. 문명의 고삐를 놓고 극단적 적의와 약육강식으로 서로를 파멸시키는 [파리대왕]인가, 오히려 원형적인 공동체 의식을 재발견하는 [파리꼬뮌]인가. 인간은 원래 함께 사는 존재가 ‘맞다, 아니다, 구제불능이다’ 그런 식이 아니라, 어떤 쪽으로 향할지 좌우하는 요인들이 무엇일지 생각할 때 비로소 고립군상물에는 평범한 생존 모험의 재미 이상의 깊이가 생긴다. 절망적 환경과 희망적 생활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사회적 일상으로 이어지는 끈이 없어진 것도, 튼튼한 것도 아닌 미묘한 고립상황이어야 겨우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 난점일 따름이다.

  <위 아 더 좀비>(이명재, 네이버웹툰)가 그런 작품이다. 기본적으로는 좀비 아포칼립스의 세계관을 따르는 듯 하는데, 살짝 박자가 엇나가 있는 것이 일품이다. 어느 날 초대형 쇼핑 오락 복합단지인 서울타워에 좀비 사태가 발생했는데, 유능한 경찰 군대가 그냥 빨리 상황을 제압해서 그곳에 좀비들을 봉쇄해버렸다. 그저 그런 사회 전망과 능력치를 지닌 청년 김인종은 어쩌다 보니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냥 그곳에서 좀비들 사이에 적당히 적응해서 혼자 1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 말고도 서울타워에서 좀비들 사이에서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 어쩌다 보니 안에 갇힌 동생을 찾아다니는 김소영, 탈영해서 오갈 곳이 없는 임경업, 알바를 하다가 갇힌 웹소설 지망생 왓 존슨 등 각자 사연을 가지고 모인 집단과 함께 지내게 된다.

  좀비 사태의 생존자 집단생활이지만 물자는 딱히 부족하지 않다. 좀비는 위험하긴 해도 무력이 된다면 죽여서, 무력이 안 된다면 좀비 흉내를 내며 슬며시 섞여서 도망칠 수 있다. 다만 군대가 바깥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기에 정작 밖으로 나가는 게 어려운 상태일 따름이다. 그런데 모두가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나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당장 주인공부터, 바깥세상의 딱히 평범한 번듯한 생활도 어려울 것 같은 전망 때문에 그냥 쉬어 가자며 눌러앉은 쪽이다. 취미를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빡빡함에 반기를 든 이들의 집단도 있다. 무엇보다, 법적 처벌을 피해서 온 이들도 있다. 한 마디로, 안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살 수도 있는 사람투성이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럭저럭 함께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각자 목표를 공유하는 여러 사람들의 협력적 분업 집단, 그러니까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여러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정보가 교류되는 열린 서비스 공간, 그러니까 카페도 돌아간다. 물자와 생존을 두고 아귀다툼을 할 절박함을 가장하지 않고, 각자의 목표를 추구하며 어쨌든 공생하는 쪽을 매번 선택하는 과정이 누적되자 생기는 나름의 질서다. 그 질서 속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배려도 어색하지 않게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좀비가 만발한 상황 속에서 느슨하게 힘을 합쳐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달래고, 재능의 부재와 노력의 허상, 꼼수를 요구하는 사회가 주는 스트레스 등 다양한 문제들을 서로 직면해준다. 집착과 서열로 이뤄진 “가족”적 사랑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감을 두며 대등하게 공생하는 공동체의 성원에 가깝게 말이다.

  이렇게 세상 온갖 묵직한 함의들이 가득 깔려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둥그런 사람들이 둥그런 티격태격을 이어가는 훌륭한 시트콤 감각으로 진행된다. 파멸적 무한대립 대신 그럭저럭 대충 지내는 공생을 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사실 이쪽이 은근히 적합한 듯하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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