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음 ‘탈’에서 출발한 ‘탈 시리즈’

움직임과 정지의 미학 실현해

서보형 감독은 "실험적인 색채는 유지하되, 매끄럽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특유의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서보형 감독의 작품에서는 영화가 가진 공포와 매혹의 정서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서 감독은 실험적 소재에 미술적인 색채를 입히며, 2016년 단편영화 <선잠>으로 영화계에 첫선을 보였다. 그는 화려한 미장센, 거창한 시나리오 대신 조명, 배우, 대사라는 기본적인 요소만으로 완성된 단편영화 <솧>를 출발로 <탈날 탈 >, <일식> 등을 발표하며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장편인 <벗어날 탈 脫>은 도발적인 시각적 전위를 다채롭게 펼쳐냈다는 평을 받으며,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선정됐다. “실험적이되 난해하지 않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서보형 감독을 만나, <벗어날 탈 脫>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물었다.

 

- <벗어날 탈 脫>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선정됐다

  “무척이나 영광이에요. <벗어날 탈 脫>은 지난해 8월 촬영을 마무리한 후 1년이나 더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입니다. ‘불일불이(不一不二)’라는 불교철학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우리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분별이 없는 상태’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요. 영화 내내 ‘나’라는 문제와 ‘너’라는 문제, 그리고 ‘관계’에 대한 고민까지 철학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죠. 제가 봐도 워낙 난해한 영화라, 메이저 영화제에 어울리는 영화인가 하는 의문이 아직도 있어요.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진 실험적, 미술적 색채를 알아봐 주셔서 부문에 선정된 것 같아요.

  특히 이번 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 행사를 세 번 진행하게 됐는데, 제가 작품 속에 남긴 해석의 여지를 관객들이 저마다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을지 정말 궁금해요. 관객들이 제 설명을 정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시길 기대하고 있어요.”

 

- ‘탈’ 시리즈가 궁금하다

  “‘탈’ 시리즈는 <탈날 탈 >, <벗어날 탈 脫>, 그리고 현재 구상 중인 <잃은 탈 奪>로 이뤄져요. 세 편의 영화 제목을 보면, 모두 한자 ‘탈’을 사용했어요. ‘탈’이라는 음을 가진 다양한 한자들을 하나씩 분해해보니, 그 조합이 굉장히 흥미롭더라고요. 예를 들어, ‘탈날 탈()’은 ‘정지할 지(止)’와 ‘머리 두(頭)’가 결합된 한자인데, 이걸 다르게 보면 ‘사고의 정지’라고 해석할 수 있어요. 또 비슷한 방법으로 ‘벗어날 탈(脫)’과 ‘잃을 탈(奪)’은 각각 ‘육체로부터 벗어난 기쁨’과 ‘날개를 펼치고 있는 큰 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하나의 글자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표현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제목으로 정했어요.

  <탈날 탈 >, <벗어날 탈 脫>의 경우, 두 영화 모두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소재에 대한 영감을 받았는데, 내용상의 공통점보다는 구성에서 연관성을 가져요. <탈날 탈 >에서는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일상 속 순간의 불쾌감을 스릴러라는 장르로 녹여냈어요. 아파트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인과관계가 끊어진 채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일들을 그려냈죠. <벗어날 탈 脫>은 불교 철학을 공부하던 중 얼핏 느꼈던 깨달음의 감각을 구현해보려 했어요. 깨달음을 얻으려는 남자와 영감을 얻으려는 여자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등장해요. 두 작품은 4:3이라는 화면비, 영화 속 장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등장한다는 설정에서 유사해요. <잃은 탈 奪>은 아직 시나리오를 구체화하진 않았지만 새로운 구성과 형식도 시도해볼 예정이에요.”

 

- 연출에서 가장 신경 쓰는 요소는

  “저는 영화 안에서 카메라의 움직임과 정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카메라의 이동과 구도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연출할 수 있거든요. 특히 피사체를 따라가며 찍는 ‘트래킹 샷’을 좋아해서 모든 영화의 중요한 장면에 그 기법을 사용해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다가가서 관객들에게 기괴함을 줄 수도, 180도 회전하면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함께 전환되는 느낌을 줄 수도 있죠.

  <벗어날 탈 脫>도 촬영기법에 대한 고민을 오래 했어요. 극 중 불교의 연기설을 표현해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각 장면을 연쇄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영화를 보면, 주인공 남자가 아름다운 꽃에 매료된 상태에서 꽃을 살짝 건드리는 장면, 꽃이 툭 떨어지는 장면, 놀란 남자가 쓰러지듯 물러나며 나무를 건드리자 새가 날아가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지나가요. 이 장면에서 비롯되는 무상의 정서와 연기설이 잘 구현돼, 관객분들께 와닿았으면 좋겠어요.”

 

- 앞으로의 영화적 목표는

  “제 영화에 대한 고민을 계속할 예정이에요. 제 영화는 ‘Sabotage Film’이라는 크레딧과 함께 시작하는데, 영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점이자 제 별명이기도 해요. ‘sabotage’는 파괴공작이라는 의미인데, 새로운 것은 늘 파괴에서 온다고 해석하고 있어요. 그래서 영화 속 대비되는 이중적인 이미지들을 제시하고, 그 이중성이 무너지는 지점들을 담으려고 노력해요.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제 영화가 기존의 경계를 허물고 나아가는 태도를 가졌으면 해요.

  또 대중의 평가에서 지나치게 동떨어져 저 혼자만이 즐기는 영화를 만들지 않도록 경계하고, 관객들과 조우하는 지점을 찾고 싶어요. 실험적인 색채는 유지하되, 난해하지 않고 매끄럽게 연출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관객들에게 새로움을 선사하는 감각적인 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영화 <벗어날 탈 脫>의 스틸컷

 

글 | 이현민 기자 neverdie@

사진 | 강동우 기자 ellipse@

사진제공 | 서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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