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의 서재] ‘격정적인 러브스토리’ 또는 ‘막장드라마’
[고대인의 서재] ‘격정적인 러브스토리’ 또는 ‘막장드라마’
  • 고대신문
  • 승인 2021.10.15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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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젊은 ‘남자’가 있다. 자질과 재능을 모두 갖춘 그의 장래희망은 농학자 또는 화학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다. 그의 아버지는 농장에서 일하다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사망했고, 그의 어머니 또한 비슷한 병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를 돌보던 먼 친척과 결혼하면서 그의 꿈은 더욱 멀어졌다. 그의 아내는 그보다 일곱 살이나 많다. 처음부터 애정이 없던 그들의 결혼은 그녀가 질병에 시달리면서 더욱 악화된다. 그녀는 신경질에 지친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집을 떠날 생각도 해보았지만 암담한 현실에 절망한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전 재산이라고 해봐야 척박한 농장과 목재소뿐이고, 그것으로는 식구들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아내의 조카가 아내를 돌보기 위해 그의 집에 들어온다. 그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고, 그녀 또한 그의 친절함에 끌린다. 아내는 둘의 관계를 눈치 채고 조카를 집에서 내쫓으려 한다. 이별의 슬픔에 절망한 두 사람은 함께 썰매를 타고 언덕 밑에 있는 느릅나무에 부딪쳐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사람 모두 살아남는다. 하지만 여자는 척추가 부러졌고 남자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아내는 불구가 된 남편과 자신의 조카이자 남편이 사랑했던 여자를 돌본다.

#2

  한 젊은 ‘여자’가 있다. 그녀는 산에서 태어났지만 부유한 변호사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소도시에서 불편함 없이 자랐다. 그녀가 열여덟 살이 되자 변호사는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두 사람은 부녀지간에 가까울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그녀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는 것을 넘어 그를 극도로 증오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대도시 출신의 젊은 건축가가 그녀 앞에 등장한다. 그녀는 첫눈에 그에게 매료된다. 그 또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의 매력에 빠졌다. 두 사람은 각자 산간지방의 가옥을 연구한다는 핑계로, 마을 곳곳을 소개한다는 핑계로 숲속을 거닐며 밀회를 즐긴다. 격정적인 사랑으로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생긴다. 남자는 여자에게 결혼을 약속하며 떠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그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다. 여자는 그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절망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오랫동안 돌보고 곁에서 지켜 준 변호사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위 두 이야기는 이디스 워튼의 ‘쌍둥이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선 프롬>(1911)과 <여름>(1917)의 줄거리를 단순하고 거칠게 요약한 것이다. 따라서 내용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뉴욕 상류귀족 출신의 워튼은 대중 독자의 취향에 영합하지 않고 순수문학의 길을 걸은 최초의 미국 여성작가로 평가된다. 그녀가 태어난 존스 가문은 뉴욕의 명문가 중에서도 명문가로 꼽힌다. 상류사회에서 “존스 가문과 발을 맞춘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녀의 집안은 유명했다. 당시 상류 귀족 계층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정숙한 부인’과 ‘자애로운 어머니’ 두 가지였다. 여성이 글을 쓰는 일은 예술 활동이 아니라 일종의 노동이었다. 더군다나 시도 아닌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육체노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워튼은 뉴욕의 상류 사회를 풍자하는 풍속소설인 <순수의 시대>(1920)로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미국문학에서 ‘자연주의 소설의 정수’로 꼽히는 <이선 프롬>과 <여름>을 통해 미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줄거리로만 보면 <이선 프롬>과 <여름>은 각각 ‘한 남자와 두 여자’, ‘한 여자와 두 남자’ 사이의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흔하디흔한 사랑이야기로 도식화될 수 있다. 얼핏 보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1813)이나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1847)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와 비교되고 동류항으로 묶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의 방점이 낭만이 아니라 격정에 찍힌다는 점에서 <이선 프롬>과 <여름>은 <오만과 편견>과 <제인 에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선 프롬>과 <여름>의 사랑이야기에는 낭만이 비집고 틀어갈 틈이 없다. 오직 격정만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 작품들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1847)에 더 가까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앞의 두 이야기를 워튼의 작품의 줄거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읽는다면 어떨까?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막장 드라마’ 혹은 ‘불륜의 서사’로 폄하할 것이다. <이선 프롬>에서 이선은 아내 지나와 그녀의 조카 매티와 한 집에서 지낸다. 매티는 이 집의 가정부이자 지나의 병수발을 든다. 이선은 그녀에게 성적 욕망을 갖고 있고 매티 또한 마찬가지다. 지나는 둘의 관계를 알고 매티를 집에서 내쫓으려 한다. 하지만 둘의 자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지나는 불구가 된 두 사람을 돌본다. <여름>에서 채리티는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돌보고 보살펴준 후견인 로열 씨로부터 청혼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 청혼을 뿌리치고 루시어스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품고 있지만 하지만 그로부터 배신당하고, 결국 또는 어쩔 수 없이 로열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선 프롬>의 이선과 <여름>의 채리티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피엔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새드엔딩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선 프롬>의 경우 이선, 지나, 매티의 삼각관계는 나름 안정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삼각형의 꼭짓점인 매티를 중심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이선과 지나는 사고를 계기로 점점 가까워졌다. 세 사람은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꼭짓점이 누가 되든 간에 이선-지나, 이선-매티, 지나-매티의 관계에서는 갈등과 불안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름>의 경우 채리티는 루시어스를 마음속에서 지우고 로열 씨를 받아 들인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작품은 ‘예술’로 불리고 또 어떤 작품은 ‘외설’로 불린다. <이선 프롬>과 <여름>도 소재로만 본다면 소위 ‘막장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작품들은 미국문학에서 ‘자연주의 소설의 정수’로 꼽힌다. 그렇다면 예술과 외설의 기준은 뭘까? 개인적인 생각에 그 기준은 소재가 아니라 방법이다. 즉 예술에서는 다루어지는 소재가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냐’, 라는 것보다도 그 소재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예술작품으로 형상화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반면 외설은 다루어지는 그 소재가 ‘얼마나 비도덕이고 비윤리적이냐’에 방점을 찍는다.


  거듭 말하지만 워튼의 소설은 미국문학에서 ‘자연주의 소설의 정수’로 꼽힌다. 간단히 말해 자연주의는 사실주의라는 큰 틀 속에서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강조하는 문예사조이다. 미국문학에서 자연주의 작가를 꼽으라면 잭 런던, 스티븐 크레인, 시어도어 드라이저, 프랭크 노리스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연주의 문학의 비조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도덕이나 윤리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은 동물적이거나 비합리적인 동기와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때로는 성과 폭력이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워튼은 자연주의 경향을 따르지만 인간을 단순히 유전과 환경이 힘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로만 보지 않는다. 그녀는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작품의 주제로 형상화했다.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다른 자연주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유전과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들은 결정론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다. 하지만 그들은 결정론의 장벽을 박차고 나서지는 못해도 최소한 자신들의 그런 처지를 인식한다. <이선 프롬>에서 이선은 엔지니어나 화학자가 될 충분한 자질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적 환경은 그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낡은 폐선’처럼 살아간다. 그는 아주 잠깐 매티와 서부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꿈을 품어보지만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 제도나 규범, 도덕적 인습이나 윤리적 전통과 맞서 싸운다. 결과론적으로는 실패하고 포기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지만 말이다.


  <이선 프롬>은 격정적인 러브스토리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학의 보고서로 읽힐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상황, 특히 산업화와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농촌의 참혹한 상황을 구체화하고 있다. 워튼은 시골을 관념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묘사의 사실성과 구체성은 실제 경험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여름>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미국 최초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교양소설’로도 불리는 성장소설은 ‘보통 유년기에서 소년기를 거쳐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한 인물이 겪는 갈등을 통해 정신적 성장과 사회에 대한 각성 등의 과정’을 담는다. 어린아이나 소년이 주인공이며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치나 세계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성장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성장’ 또는 ‘자기형성’이다. 하지만 <여름>은 루시어스를 포기하고 로열 씨를 선택한 채리티의 결정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라는 질문을 남긴다는 점에서 보통의 성장소설과 차별된다. 다시 말하지만 소재가 아니라 소재를 다루는 방법이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가른다. 게다가 그 방법이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에 따라 예술적 진심이 통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한다.

윤정용(초빙교수·세종캠 글로벌학부)

[편집자 주] 이 글은 1935호(10월11일자)에 게제된 <고대인의 서재>의 필자 원문 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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