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과에 왜 진학했냐는 질문을 받으면 민망한 표정과 작은 목소리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하던 때가 있었다. 확신은 없어도 포부를 갖고 학교생활을 하던 새내기 시절 ‘인권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다. 그 강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서 진행됐다. 계단을 걸어 올라 강의실에 갈 때마다 배리어프리가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는 인권 수업에 의문을 품었다. 수업을 들으러 갈 때마다 계속되는 찝찝한 고민에 용기를 내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모든 이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배우는 수업이 누군가는 들을 수 없는 수업이 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거나 배리어프리가 보장되는 건물에서 수업이 진행됐으면 좋겠습니다.’ 조심스레 보낸 메일에 교수님은 덕분에 많은 것을 느꼈다며 엘리베이터 설치를 논의해보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무언가를 이뤄낸 듯한 기분에 뿌듯해했다.

  그 후 일 년이 지나고 고대신문의 기자가 됐다. 학교의 배리어프리 지도에 대한 기사를 쓸 때 여전히 그 건물에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건물이 너무 노후해서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내 뒤통수를 친 건 엘리베이터 설치 여부가 아니었다. 나는 내 문제제기 이후에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메일을 보낼 때 진정으로 해결을 견지했을까.

  요즘은 전보다 더 많은 사회문제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들은 사회부 기자인 나에게 하나의 '아이템'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됐다. 주제를 선정하고 발로 뛰며 취재하고 '관심이 필요하다'는 기사를 적을 때 나는 과연 그들을 진심으로 대했을까.

  대학 강의실의 배리어프리 보장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해결되지 않을까. 나는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만 요구한 걸지도 모른다. 문제 제기는 해결의 동력이 되지 못한다. 엘리베이터 설치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난관이 있는지 알아봤어야 한다. 건물이 노후화돼서 엘리베이터 설치가 어렵다는 사실을 파악해내고, 그 건물에서 수업이 열리지 않도록 제시했어야 한다. 진정으로 개선을 바란다면 문제 발견을 넘어 해법을 찾아보는 열정이 필요하다. 오늘도 그 계단 앞에서 내가 놓친 열정을 헤아려본다.

 

유승하 기자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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