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훈 문과대 교수·한국사학과

  필자의 지도교수가 꽤 유명한 분의 연구를 혹독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이게 글인가? 통찰이 없어!’ 늘 완곡하게 말씀하시는 분에게 이 정도면 정말 싫다는 의미여서, 이후로 통찰이라는 화두가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다. 알 듯도 하지만, 여전히 역사적 통찰을 딱 짚어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처음 고대에 발을 들여놓을 때 참 이상했다. 본관 앞에 커다란 인물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학이란 곳에 있으니 큰 인물이려니 했는데, 학교의 중흥자란다. 인촌(仁村)을 몰랐으니 무지하기도 무지했던 셈인데, 동상을 본관 앞에 큼직하게 세워놓은 것을 보니 학교가 사립은 사립이구나했다. 명색이 역사학도라는 생각에 인촌에 관한 연구성과를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제대로 된 연구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시간이 지나며, 인촌의 크기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지기는 했지만, 관련 연구가 너무 적어서 사회적으로 문제 되지 않으려나 우려스러웠다.

  그런데, 정말 사고가 났다. 대법원판결을 거쳐 인촌에게 수여한 서훈이 취소됐다. 친일 행적이 문제가 됐다는데, 교우 출신 구청장이 나서서 학교 인근 인촌로 이름까지 바꿔버렸다. 볼썽사나웠다쟁점이 뭐였을까? 인촌이라는 인물에 접근할 실체적인 성과가 없는데, 어떻게 법적 다툼이 진행됐을까? 어떻게 결론에 도달했지나름의 합리성이 있었을 테지만 역사학자로서는 의문만 꼬리를 물지 답은 짐작되지 않았다.

  작년은 ‘4·18’ 60주년이었다. 본관 앞 기념물은 사적으로 지정됐고, 몇몇 기록은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기념 전시회도 열렸다. 1960년 당시는 4월에 학기가 시작됐는데, 신입생 환영회는 순식간에 정의를 외치는 열정으로 덮여버렸다. 4·18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전시회에서 사건에 직접 참여한 선배들도 여러 분 만났다선한 분들이었다. 전시된 사진에서 이십 대 시절 자신의 모습을 찾으며 감격의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선의로 대학 신입생 시절 역사의 현장에서 스스로 역사가 된 듯했다. 필자도 코끝이 찡했다. 그분들의 순수성을 넉넉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답답했다.

  연세대는 60년 전 사건에서 중심에 있지 않았다. 사건 이후 그 학교의 누군가는 사진 자료를 수집했다. 부지런히 관련자 인터뷰도 진행했다. 그렇게 모아진 두툼한 자료철은 4·19 60주년을 기념하는 현대 기록 유산으로 지정받았다정작 사건의 주역임을 자부하는 우리는 편린의 자료 몇 점만 추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진 자료를 연세에서 빌릴 수밖에 없었다. 민망했다. ‘인문학으로 시작된 학교의 뿌리가 깊기는 하구나잠깐 자조도 했다. 이쪽에서 역사의 주역임을 자부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는 성찰을 가지고 후일을 위해 기록을 집적했다. 겨우 60년 지났는데 그 혜안이 빛을 발했다.

  인촌에 대해 남들은 뭐랄 수 있겠지만, 학생이나 교우가 뭐라는 것은 유감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촌에 대한 일관된 기억은 머슴 교장이다. 쓰레기를 줍는 노인 청소원이거나, 학교를 지키는 수위 영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인촌이었다는 것이다. 인색한 분이었다는데, 그에게서 학비를 지원받은 미래의 동량(棟梁)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 학교의 위상을 높이는데 돈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유진오는 <양호기>에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절절히 기록했다. 그게 오늘날 고대의 바탕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본관 앞 인촌상. 그분의 모습을 잘 담은 상이라는데 이견이 없다그러나 인품을 드러내기에 넉넉한지는 모르겠다. 필자더러 준비하라 했다면, 머슴 교장을 상상했을 것 같다. 정문 옆 낮은 자리에서 본관을 올려다보게 세웠으면 어땠을까? 인류의 지성이 활동하는 공간을 꿈꾸며, 자신을 낮추고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머슴 교장을 형상화했다면! ‘누구시죠?’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고대는 이런 분이 세웠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 중 한 명이었다.’ 설명했을 것 같다. 한 뼘만 더 성찰했다면. 인촌상은 조금은 다른 가치를 품고 가슴 깊은 곳 우리 긍지가 되었을 터였다

  한국 사회에 지금의 결정을 다시 돌아볼 시간이 분명 올 것이다인촌은 저명인사 중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인물이었다. 엄혹한 감시 속에 안창호의 유족을 남모르게 후원했다. 친일로 그의 일생을 재단한 것은 너무 용감하다. 역사가 언제 그리 쉬웠던가. 성찰이 필요할 때, 우리가 준비됐으면 좋겠다. 도둑처럼 다가올 시간에 허둥지둥 남의 혜안에 감탄하며, 남이 준비해준 성과에 신세 지는 일이 또 없다면, 더없이 좋겠다. 몇 년 있으면 고대 나이는 백이십 년, 두 갑자(甲子)가 된다. 겉모습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이 통찰이라면, 역사적 통찰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이를 설명해내는 것일 거다. 시간이 많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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