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무쌍한 ‘악’의 매력, 콘텐츠를 물들이다
변화무쌍한 ‘악’의 매력, 콘텐츠를 물들이다
  • 이주은 기자
  • 승인 2021.11.28 2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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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악의 서사

빌런의 무기는 솔직함과 통쾌함

깊은 서사로 단편적 악 탈피

법감정과 맞닿은 사적 복수

 

  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는 한국 드라마 희대의 ‘빌런’들로, 주인공보다도 그 이름이 크게 회자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빌런의 행보는 선한 인상과 착한 말투, 투철한 도덕심을 가진 모범적인 캐릭터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무엇보다 욕망에 솔직하고, 자신을 방해하는 선한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악행도 서슴지 않는다. 대중들은 이러한 ‘빌런’ 캐릭터를 경계하면서도, 폭주하는 그들을 보며 동시에 묘한 통쾌함도 느낀다. 이다운(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대중들은 관습과 제도를 넘어 자신의 목적을 거침없이 시행하는 악인들의 자유로움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최근 드라마 <빈센조>, 영화 <베놈>, <크루엘라>와 같이 ‘악인’이 주축이 되는 콘텐츠가 주목받으며, 악의 서사는 새 국면을 맞았다. 단순화된 악에서 벗어난 서사를 가진 빌런이 나타나기도 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악을 무찌르는 ‘다크히어로’와 같은 악한 영웅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권상집(한성대 기업경영트랙) 교수는 “과거 빌런은 선을 상징하는 주연 캐릭터를 방해하는 악한 캐릭터로 그려진 반면, 지금의 빌런은 극의 중심에서 스토리를 끌어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영화 [크루엘라]의 '클루엘라',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김주영', 영화 [조커[의 '조커'
왼쪽부터 차례대로 영화 <크루엘라>의 '클루엘라',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김주영', 영화 <조커>의 '조커'

 

  ‘영웅’보다 매력적인 ‘빌런’

  과거 선한 주인공 중심으로 흘러간 서사에서 악당은 주인공과 적대하는 반동 인물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점차 매력 있는 서사를 지닌 악당들이 등장함에 따라, 악당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에 따르면 영화 <크루엘라>, <베놈>은 각각 약 190만, 380만 명의 누적관객수를 달성하며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다. 

 

드라마 [킹덤2[의 중전 '계비 조씨'
드라마 <킹덤2>의 중전 '계비 조씨'

  관객들이 빌런의 서사에 매료된 이유는 무조건적인 선에 대한 호응이 줄어든 사회적 배경에 있다. 경쟁 구도가 고착화된 사회 속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빌런 캐릭터의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2>의 중전 ‘계비 조씨’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가족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하는 모습으로 대중에 깊은 인상을 줬다. 2021년 방영을 마친 <펜트하우스> 시리즈의 ‘천서진’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살인까지 감행한다. 천서진이 다른 주인공을 낭떠러지로 밀었을 때, 닐슨코리아 기준 순간 시청률이 약 19%에 달할 만큼 큰 화제를 낳았다. 류수연(인하대 프런티어학부) 교수는 “욕망에 빠져 ‘빌런화’된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호응은 여성에게 순종과 인내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저항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 영화 [데드풀[의 '데드풀'
왼쪽부터 차례대로 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 영화 <데드풀>의 '데드풀'

  대중들은 빌런들의 거침없는 행동을 보며 대리만족 한다. 2018년 개봉한 <베놈>은 인간에 공생하는 외계생물체 ‘심비오트’의 공격을 받은 주인공 ‘에디 브록’이 난폭한 괴생물체인 ‘베놈’과 공생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동네 소매치기범을 단숨에 삼켜버리는 ‘베놈’의 잔인함은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도 통쾌함을 선사했다. 영화 <데드풀>의 ‘데드풀’도 화면 너머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거침없는 욕설을 내뱉는 등 발칙한 언행과 행동을 선보인다. 권상집 교수는 “정치 지도자 등 고위층들의 도덕성에 결점이 많이 드러나면서, 이상적인 선한 영웅은 대중에게 공감을 받기 어려운 존재가 됐다”며 “오히려 현실적인 악한 캐릭터에 관객들이 반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입체적 서사로 진화한 빌런

  과거의 빌런은 악한 모습만 단편적으로 비쳤다면, 최근 깊은 사연을 지닌 빌런들의 ‘악’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빌런을 주축으로 그리는 작품들은 빌런에게 사연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살아온 인생과 배경, 고민 등을 극적으로 그려 낸다. 관객들은 입체적 인물로 표현된 빌런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2019년 개봉한 영화 <조커>는 <배트맨> 시리즈의 빌런 ‘조커’의 과거 서사를 담았다. 코미디언을 꿈꿨던 평범한 시민 ‘아서 플렉’은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희귀병 치료를 받지 못하는데, 영화는 사회적 불평등에 분노한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2021년 개봉한 영화 <크루엘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에서 코트를 만들어 입기 위해 달마시안을 잡아가는 빌런 ‘크루엘라’를 주인공으로 재조명한 영화다. 영화 속에서 크루엘라는 순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겪은 인물로 묘사된다. 유년 시절 그녀는 특별하고 범상치 않은 성격 탓에 퇴학을 당하고 어머니의 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하는 등 기구한 사연을 겪는다. 그녀의 사연은 관객들이 그녀가 악랄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공감하게 만들었다. 

  사연을 가진 빌런의 서사는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대중들의 몰입을 더욱 이끄는 효과를 지닌다. 윤석진(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캐릭터인 빌런에게 대중들은 현실감을 느낀다”며 “빌런의 악이 완전히 정당화되기보단, 인간의 복합적인 감정에 대한 공감을 이끄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늘날 한국 콘텐츠 속 여성 빌런의 서사 또한 정형화된 ‘악녀’의 모습을 탈피하며 변화를 맞고 있다. ‘악녀’는 통속극에서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여성 빌런을 일컫는 말로, 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가 대표적인 악녀다. 거친 말을 내뱉고 울분을 터뜨리는 등 분노하는 모습은 악녀의 주된 이미지로 연상된다. 악녀는 일차원적으로 악한 성향을 지니고, 선한 여주인공을 방해하는 보조 캐릭터로서 등장하곤 했다.

  최근 여성빌런은 깊은 서사를 부여받으며 극을 이끄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2019년 방영한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빌런 ‘김주영’은 자식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은 채 입시에 매진하는 한 가정을 파괴하고자 교묘한 수법을 쓰는 인물로 그려졌다. 독특한 김주영의 서사는 그가 악한 인물로 변모하게 된 이유를 시청자들에게 납득시켰다. 이다운 교수는 “한국 콘텐츠 속 악녀들은 다분히 일차원적으로 묘사됐던 과거 악녀들과 달리 행동과 심리에 개연성을 부여받았다”며 “이들은 단순히 신경질적인 인물로서 다소 하찮게 그려지는 정형화된 악녀와 비교해 권력자의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악’에는 ‘악’으로 맞서다

  정의로 악을 맞서는 전형적인 영웅과 달리, 오늘날 악에는 똑같이 악으로 응징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이 인물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선을 도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구현하는 캐릭터로, ‘다크히어로’라고 불린다. 씨네21 조현나 기자는 “다크히어로는 때때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악행을 저지르지만, 결국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미덕을 지닌 인물”이라며 “그들의 행동은 모든 면이 완벽하거나 교훈적이지 않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빈센조]의 '빈센조'
드라마 <빈센조>의 '빈센조'

  최근 한국 콘텐츠엔 다양한 다크히어로들이 나타나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드라마 <빈센조>의 ‘빈센조’, <모범택시>의 ‘김도기’ 등이 그 예다. <빈센조>는 이탈리아 마피아 변호사 출신인 빈센조가 악행을 일삼는 기업인 ‘바벨그룹’과 대립하며 악으로 처단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빈센조>의 주인공이자 악인 캐릭터인 빈센조는 피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는 자신과 대적하는 빌런들을 화형 등의 잔인한 수법으로 처형하며, 악당의 방식으로 악당들을 응징한다. 이정희 미디어평론가는 “빈센조는 법을 수단화하고 법의 경계를 뛰어넘는 악의 영역까지 활용한 히어로”라고 평가했다. 

  2021년 방영한 드라마 <모범택시>의 ‘김도기’는 억울한 피해자들을 대신해 가해자들을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처벌한다. ‘김도기’가 활약하는 사적복수대행팀인 ‘무지개운수’는 가벼운 사법 처벌에 분노한 피해자들이 복수를 의뢰하면, 납치와 감금 등의 방식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한다. 또한, 가상의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악마 판사>의 ‘강요한’은 국민참여재판 라이브 법정 쇼에서 범죄자들에게 ‘236년형’, ‘태형’과 같은 극단적인 형량을 부여한다. 이러한 다크히어로들은 모두 법, 경찰과 같은 공권력의 힘을 벗어난 ‘사적 복수’를 감행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권상집 교수는 “법에 의한 정의가 시민사회의 기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현재 국민의 법감정”이라며 “악랄한 범죄를 단호하게 처벌해 대중들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수단으로 다크히어로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적 복수 소재가 계속해서 등장 하는 세태를 고찰해봐야 할 필요성도 지적됐다. 윤석진 교수는 “통쾌한 정의 구현은 콘텐츠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현실은 완전히 반대라는 생각이 반복되면 오히려 현실에 대한 열패감이 생길 수 있다”며 “콘텐츠 속에서 자극적인 사적 복수 요소를 구현하는 것에 대해 대중과 창작자 모두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처단해야만 하는 존재였던 ‘악’이 콘텐츠 속에서 다각도로 조명됨으로써, 악과 정의에 대한 사회적 고찰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제기된다. 이정희 평론가는 “악인을 다루는 콘텐츠를 통해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흔한 히어로 서사에서 탈피해 빌런과 관련한 다양한 서사가 나오는 것은 의미 깊은 일”이라며 “보다 다양한 특성과 서사를 가진 빌런들이 더 많이 나타나면 콘텐츠 다양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글 | 이주은 기자 twoweeks@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넷플릭스, 티빙,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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