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부터 수도권의 인구분산과 지방의 고등교육 향상을 도모하는 정부의 시책에 따라 각 대학이 지방 캠퍼스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에 1980년 본교도 조치원에 서창캠퍼스를 설립했다.

처음 대전 유성에 캠퍼스를 건립하기로 했던 본교는 대전소재 지방대학들의 반대에 부딪혀 계획을 수정해 조치원에 캠퍼스를 설립하기로 했다. 당시 본교가 추진 중이던 ‘양적(量的)발전’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됐던 서창캠퍼스의 개교는 △정원확충 △재정난극복 등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던 본교의 해결책으로 적극 추진됐다.

본교는 정원 1,130명으로 △화학공학과 △재료공학과 등 13개 학과를 교육부(당시 문교부)에 신청했으나 △물리학과 △영어영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등 8개 학과의 정원 4백 명만을 허가받았다. (본지 79년 9월 25일자 발췌)기존의 계획보다 많이 축소된 서창캠퍼스의 허가 내용을 놓고 당시 이운범 사무처장은 “일단 학교발전을 위한 계기가 마련됐다는데 그 의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서창캠퍼스는 1980년 신학기부터 신입생을 받는다는 방침을 세워두고도 교수진 및 시설 확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가교사를 임대해 1년간 수업하는 방안과 안암캠퍼스에서 1년간 수업하는 방안을 놓고 논의 끝에 1년간 안암캠퍼스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1981년 3월부터 지금의 서창캠퍼스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또한 당시 안암캠퍼스의 교수진도 타교에 비해 부족한 상황이었음에도 서창캠퍼스의 설립으로 안암캠퍼스의 교수들이 출강을 해야한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총 80억 가량의 소요예산이 필요했던 서창캠퍼스의 설립을 위해 10억은 재단에서, 나머지 70억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의 수익사업과 거국적 모금을 전개해 거액의 기부자에게는 건물의 이름을 기부자의 이름으로 하는 방안도 검토 됐다.

또한 당시 서창캠퍼스는 교육환경이 낙후된 지방의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안암캠퍼스와는 달리 내신성적 50% 시험성적50%로 입시전형을 내놓았다.

서창캠퍼스는 처음 설립당시 주변에 학생들이 기거할 숙소와 교통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치원 주민들이 서울에서 조치원을 오가는 고속버스 유치를 추진했다.

또, 학교와 가까운 신안동 1·2구에 2백가구, 서창동 2구 2백가구중에서 1백여 가구가 하숙생을 맡을 준비를 하는 등 학교 측과 지역주민 모두 여러 가지 제반조건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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