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전문학교가 들어선 러시아학교는 매우 협소했다. 그러나 개교 초기에는 학생수가 많지 않았고, 1학년 학생들뿐이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지낼만했다. 1905년 5월 31일 당시 보전 재학생은 1백명이었다. 제1학기 시험을 치른 학생수는 법률학전문과가 38명, 경제학전문과가 36명 등 모두 74명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05년 9월에 야학교인 한성법학과 학생 21명을 인수하면서 법과 야간부를 신설했고, 1906년부터는 법률학 전문과를 주간과 야간으로 나눠 신입생을 모집하게 됐다. 입학생 수는 제1회에 비해 40명이 증가한 140명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어학교의 협소한 교사로는 1, 2학년을 합한 학생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06년 7월에는 인접한 김교헌의 가옥 2백여 칸을 매입해 수리·확장했다. 1907년부터는 3년제로 학제를 개편해 당시로서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전문교육기관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07년 입학생은 법률과 주간이 91명, 야학이 82명, 경제과 야학이 64명 등 모두 237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은 일제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됐고, 1907년에는 설립자인 이용익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 각국에 알리고 귀국하던 중 블라디보스톡에서 사망하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어 1910년에는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지게 되면서 학생수는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그것은 설립 초기 보전 졸업생 수(표 참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졸업일시

법과

경제과

1907.4.15(주)
         2.15(야)

제1회 34명
주학 16명, 야학 18명

제1회 18명

1908.1.29

제2회 48명
주학 28명, 야학 20명

 

1909.

졸업생 없음

 

1910.2.15

제3회 15명

 

1911.1.28

제4회 45명

제2회 22명

1912.2.3

제5회 36명

1909년에 졸업생이 없는 것은 1907년부터 3년제로 개편됐기 때문이다. 1908년과 1910년에 경제과 졸업생이 없는 것은 1906년에는 신입생이 없었기 때문이고, 1907년에는 64명이 입학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2학년까지 진급하였던 34명이 자퇴해 양정의숙에 편입한 사태에 따른 것이다.

한편 초기의 교수는 다른 직책을 겸임하는 외부인사가 많았고, 아직 전임교수제도가 없어 일률적으로 강사로 호칭됐다. 확인되는 당시 강사의 명단은 14명이며 그 중에서 학교 임원 4명이었다.

학칙에 의하면 수업료는 월 1원씩으로 돼 중도 퇴학자에 대해서는 경비금이라는 명목 아래 월 2원씩을 환수했다. 그러나 당시 수업료를 내지 않은 것으로 회고하는 졸업생도 있으며, 실제로 수업료는 물론 교과서까지 무료배부한 일이 있었다.

야간수업은 교실에 램프나 촛불을 켜고 진행했다. 필기는 대부분 붓으로 했다고 한다. 시험은 월종시험, 학기시험, 학년시험 및 졸업시험의 4종이 있었다. 시험을 통과하기는 매우 어려웠으며, 1905년 제1학기말 시험의 경우 모두 82명이 응시했으나,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45명이 낙제할 정도로 엄격했다. 

여름방학은 두 달(7월 15일~9월 14일), 겨울 방학은 일주일(12월 29일~1월 4일) 정도였다. 또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이화의 윤곽 안에 보자를 넣은 모표를 단 사각모가 있었으나, 교모를 쓰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다. 이는 교모를 쓰기 위해서는 삭발을 해야 했으나, 학생들 가운데는 삭발을 할 바에는 차라리 퇴학을 택할 정도로 삭발에 반대하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었다.
 
학생활동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활발한 토론회 활동이다. 토론회는 보전이나 양정 등 학교가 주최하는 경우도 있었고, 청년회 등 사회단체에서 주최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법학과 학생들의 소송연습회나 법률토론회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 또 1906년 12월에는 학생과 교직원이 모두 포함된 보전친목회를 창립해 매월 <친목> 이라는 잡지를 1907년 3월에는 교우회가 창립되어 매월 <정법학계>를 발간했다. <법정학계>의 발간 목적은 보전 학생 뿐만 아니라 널리 동포의 계몽각성을 촉구해 국가사회를 구제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학생생활을 거쳐 영광의 졸업장을 받게 되는 졸업식의 광경은 그야말로 진귀한 광경을 연출했다고 한다. 우리의 손으로 창립한 최고학부였던 만큼 두문불출하던 학자들도 도포에 관을 쓰고 여덟팔자 걸음으로 정각이 되기 전부터 운집해 장관을 연출했다. 이와 같이 설립초기부터 국권상실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광건학교 교육인재 이복국권(廣建學校 敎育人材 以復國權)’이라는 보전의 꿈은 영글어 가고 있었다.

배항섭(<고대 1백년사>편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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