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서 나는 한 주에 한 차례 한국어 키보드를 쓸 수 있는 인터넷 카페를 방문하고 있다. 테마에서 한국어 키보드를 쓸 수 있는 인터넷 카페는 그 곳 하나뿐이기 때문에 그 곳은 항상 테마에 사는 한인들로 붐빈다. 자주 인터넷 카페를 방문하다 보니 그 가게를 드나드는 한인들이나 가게를 보는 직원들과도 꽤나 친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직원들 중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얼핏 보면 한국 사람처럼 생겼지만, 한국인이라고 하기엔 피부색이 너무 짙은, 항상 별로 말 없이 인터넷 카페에서 일하는 여자아이. 계산대 앞에서 그 아이를 만날 때마다 말을 걸어보려다 용기가 안 나서 그냥 돌아서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항상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테마에 살고 있는 걸까, 가나인일까 한국인일까, 나이는 몇 살일까. 그 아이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던 나에게, 다른 한인들이 그 아이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가나에는 가나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 많은데 그 아이도 그 중 한 명 이라는 것이었다. 테마는 가나에서 가장 큰 항구가 있는 곳이기에 여러 나라에서 온 선원들이 많이 머물고 있다. 그 들 중 상당수는 가나인 여자들과 동거하고 있다. 테마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한국인의 외모에, 한국인 보다는 훨씬 짙은 피부색을 가진 아이들은 가나인과 한국인 선원 사이에서 난 혼혈아들이었던 것이다.

항구를 끼고 있는 가나에는 여러 나라에서 세운 수산업 회사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회사로 손꼽히는 회사의 소유주가 한국인이다. 그러다 보니 테마에는 이 회사를 주축으로 해서 수산업에 관련된 일을 하는 부유한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런 수산업 종사자들과, 이 회사의 판매망을 이용해 한국산 전자제품을 파는 여러 유통업 관계자들, 그 외 요식업 종사자들과 정부 관계자들, 여러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가나 한인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그 규모가 큰 편이다. 이러한 가나 한인사회의 다른 축을 이루는 이들이 가나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다. 한인들의 숫자가 200명 정도되는 이 곳에서, 이 들의 숫자가 40여 명에 이르니 말이다.

이러한 혼혈아들의 대부분은 가나인 어머니 밑에서 길러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한국인 아버지들은 몇 년 동안 가나에 머물다 한국에 돌아간 후엔, 가나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을 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카페에서 일하고 있던 여자아이가 차마 말을 걸기 어려울 정도로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 이런 가정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임을 생각하니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과 한국인들은 어떤 모습일까. 아버지가 그립지는 않을까. 여러 궁금증만 키워오던 끝에 지난주에서야 나는 드디어 그 아이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라고, 한번쯤 같이 식사나 하지 않겠냐고. 어색함에 어쩔줄 몰라 하며 조심스레 식사 제안을 하는 나에게 그 아이는 순순히 그러자며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주말, 우리는 가나 재래시장에 가서 장을 봐와서 함께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그 아이는 내게 가나에 사는 한국인 혼혈아들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들려 주며, 그들 대부분이 많이 외롭게 산다고 말했다. 가나인 어머니들 또한 아버지가 떠난 후에는 재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국인 혼혈아들은 혼자 남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란다. 한국인도, 가나인도 아닌 또 다른 피를 가진 사람들. 한인 사회, 가나인 사회 어디에서도 온전히 적응할 수 없는 그들의 삶이 매 순간마다 양 쪽의 사회에서 받은 상처들로 얼룩져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국인이든 가나인이든 그게 무슨 대수냐고, 그냥 모든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지내면 되지 않겠냐는 나의 위로에, 그 아이는 씁쓸히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고, 그들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을 열고,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을 닫는 사람들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중국인도, 일본인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그 아이의 표정에서 한국에 대한 뿌리깊은 원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한국인들의 배타성을 원망하면서도 가고 싶은 나라를 묻는 나의 질문에 한국을 빼놓지 않는 그 아이를 보며, 애증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딜레마를 느꼈다. 그들에게 한국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김치를 좋아하는데, 비싸서 사먹을 수가 없다는 말이 맘에 걸려, 돌아갈 때는 집에 있는 깍두기를 한 통 선물로 건넸다. 몇 번 씩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모습이 나를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가나에 있는 한국인 혼혈아들. 그 속에서 나는 한국에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종류의 삶의 방식과, 그 속의 아픔들을 절절히 느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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