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공간은 기술적으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사이버공간은 시공간적 제약의 완화, 차별적 단서의 제거와 지위의 평등화, 다양한 정체의 실험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과, 책임의 회피, 무절제와 기만, 언어폭력, 집단규범의 약화 등과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양면적인 기술이 사회적 요인과 접목되면서 사이버공간은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보이게 된다. 여기서 사회적 요인이란 현실공간의 개인, 상호작용, 사회구조 등이며, 사이버공간은 이러한 현실공간의 모습을 투영하게 된다.

우선 행위자로서의 네티즌들이 사이버공간으로 들어갈 때 성별, 인종, 연령, 직업 등과 같은 사회적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사이버공간에서 신체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적 차별의 단서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네티즌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된다. 흔히 신체나 외모를 통해 발현되는 사회적 단서들이 사이버공간에서는 사용자 아이디나 대화명, 전자우편 주소 등을 통해 재해석된다. 명시적인 단서가 없는 경우에도 글쓴이의 어투나 글의 논조(voice) 등을 통해 그 사람의 정체나 역할이 추론된다.

네티즌 스스로 사회적 존재로 인식해야
사이버 공간, 현실세계 발전에도 기여

이러한 재해석의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타인의 정체와 역할에 대한 인식과 기대가 이념형(ideal type)으로 수렴되는 경향이다. 현실공간에서는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나 기대가 다양한 변이의 폭을 가지고 있지만, 동일한 역할에 대한 인식이나 기대가 사이버공간에서는 네티즌이 가지고 있는 이념형에 따라 형성된다. 이는 마치 다양한 색상이 투과되면서 몇 가지 단색으로 나타나는 역스펙트럼 효과에 비유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선명성에 따라 사이버공간에서는 정체나 역할간의 대비가 더 뚜렷해지고, 현실공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새로운 행위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이버공간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감정적 대립이나 마찰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인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네티즌들에 의한 사회적 단서의 재도입과 이념형에 기초한 인식은, 사이버공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의 단면들이 네티즌들의 인구학적 구성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버공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사용자 인구가 대학생이나 전문직 종사자를 중심으로 이뤄졌던 인터넷 초기에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초고속통신망이 일반 가정으로까지 급속하게 보급되면서 인터넷 사용자 인구의 저변이 확대됨에 따라 사이버공간은 복합성을 지닌 사회적 공간이 되고 있다. 그 동안 놀이나 여가활용의 기회를 충분히 가지지 못했던 청소년층과 공적인 참여로부터 배제되었던 주부층의 비중이 커지면서 인터넷 초기에 확산되었던 자유주의적 낙관론은 점점 현실 적합성을 잃어가고 있다.

게시판은 사이버공간 기술의 양면성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장이다. 네티즌들은 전자우편, 게시판, 대화방, 메신저 등과 같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상호작용하며 각 채널은 독특한 사회적 특성을 나타낸다. 이용되는 맥락이나 사이트의 특성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정체노출의 정도가 비교적 낮으면서도 공개성의 정도는 높은 게시판에서 사이버공간의 양면성이 가장 잘 드러난다. 게시판을 통해 네티즌들은 정체노출이나 그에 따른 보복의 위협을 적게 받으면서 개인적인 고민이나 억울한 사연, 사회현상에 대한 의견이나 정치적 견해를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사이버공간의 게시판은 현실공간의 구체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다양한 목소리를 표출하고 사회적 관심의 환기를 시도하는 장이다. 게시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호비방이나 언어폭력, 성차별이나 음란게시물 등은 현실공간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토론문화, 성차별주의와 남성지배문화, 정실주의와 연줄문화와 같은 현실공간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이다.

사이버공간이 결국 현실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때 개방적이고 참여가 용이한 사이버공간은 현실사회의 쟁점이나 문제가 쉽게 드러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일견 독특해 보이는 사이버공간의 많은 사회적 현상들도 현실공간의 네티즌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따라서 사이버공간에서 나타나는 문제나 쟁점을 기술만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자살의 경우 우리가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자살을 조장하는 사회적 여건이나 개인의 불안정한 심리상태이지 인터넷의 기술적 속성은 아니다.

요컨대 사이버공간은 현실공간의 단순한 모사(simulacrum)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신세계도 분명 아니다. 사이버공간은 행위자로서의 인간이 사회적 환경 속에서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공간이고, 네티즌들은 구체적인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역사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네티즌들이 차별적인 인식과 성숙되지 못한 토론문화에 젖어있는 한,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시공간적 제약은 완화될지언정 사회적인 제약은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네티즌들이 사회적 담론의 주체이자 변혁자로서 자기인식을 제대로 할 때, 사이버공간은 다양한 역할과 문화를 연기하고 실험할 수 있는 좋은 장이 될 수 있고, 따라서 현실공간의 발전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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