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이제 마흔에 시절이 하수상하다는 소리를 하기는 분에 맞지 않은 터. 허나 학생들이 총장실 점거하는 꼴은 숱하게 보아 왔으되, 수백명의 교수들이 연판장을 돌리더니 급기야 총회까지 열어 총장 해임권고안까지 가결시켰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라 한마디 안할 수가 없다. 고대가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는가 하는 비탄도, 뻔히 알고 있을 사태의 전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일도 삼가련다. 에두르고 변죽을 울리는 일은 애시당초 나와는 거리가 멀다. 직설법으로 결론부터 말한다. “김정배 총장, 물러나시오!”

민심은 천심이라 했다. 한두명도 아니요, 교수 직원, 학생 할 것 없이 압도적 다수의 교내 구성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퇴진을 외치고 있지 않은가? 행여 니네하며 서로 미루기만 하며 자신들 이름으로 성명서 하나 내지 못하고 일개 직원 이름으로 해명서나 내게 하는, 直言과는 애시당초 거리가 먼 소인배같은 참모들에 둘러싸여 이 도도한 민심의 흐름을 모르지는 않을터. 민심이 이러하다면 만사 훌훌 털어 버리고 과감히 용퇴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지난 임기동안의 공과를 논하면서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하지 말자. 규정대로 총장에 재선임되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형식논리 내세우며 핏대를 올리지도 말자. 국가원수가 호헌(헌법을 수호)하겠다는 너무나 당연한(?) 선언을 했던 전두환씨의 ‘4·13 호헌조치’가 왜 국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고 6·10 항쟁으로 이어졌으며 6·29 항복선언으로 귀착 됐는지는 주지하는 바가 아닌가. 노욕과 노탐에 눈이 멀어 대세를 읽지 못하고 구차하게 자리에 연연하며 명철보신하려던 지도자들의 종말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 왔는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지도자의 영(令)이 서지 않는 조직을 어찌 조직이라 할 것이며, 어찌 그 조직이 순조로이 굴러가길 기대하리. 더구나 그 조직이 일개 사조직도 아니고 大고려대학교인 것을….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대학 총장자리가 장관이나 총리가 되기 위한 징검다리로 변질됐다손 치더라도, 돈 잘 끌어 오는 총장이 최고인양 대접받는 세상이래도, 그래도 고대총장은 단순히 일개대학의 총장이 아니라 한국 정신사의 맥을 잇고 한국 사상계를 리드하는 지성의 도덕적 표상이어야 한다.

진퇴를 분명히 하는 것도 틀림없는 지도자의 덕목이다. 나는 김정배 총장에게 명예에 집착하지 말고, 고려대와 한국 지성계를 위해 과감히 용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오늘 나는 40여년전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고 한 채근담의 한구절을 들며 선비의 도리와 지조를 논하던 마음의 스승 조지훈 시인의 심정이 되어 보는 것이다.

<江湖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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