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앙일보는 2002학년도 전국대학평가의 결과를 연재하고 있다.

조사기관의 평가방법에 있어서 소위 신뢰도, 타당도, 객관도에 관련되는 오차범위에 의하여 나타나는 결과해석에서 논의의 여지는 있겠으나 우리들에게는 적잖은 충격을 주며,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대학의 존재목적이 연구와 교육이라면 대학의 우열은 교수-학생-시설 중에서도 실력과 효율적인 강의 방법을 겸비한  교수가  제1차적 기준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좀 극단적인 비유일지 모르나, 궁전 같은 캠퍼스에 전국의 수재들만 모아 놓았더라도 실력 없는 교수가 강의하는 대학보다는 천막교실에 둔재들일지라도 세계적인 실력의 교수가 가르치는 대학이 일류대학인 것이다. 물론 인문사회계에 비하여 자연계의 경우는 훌륭한 시설이 우수 교수와 우수 학생의 조건 못지 않게 일류대학의 필수조건이기는 하지만 역시 제1차적 요건은 교수의 질에 달려있다. 입학생들이 수재냐 둔재냐는 대학의 우열과는 별로 상관없는 것이다.
블롬(B.S.Bloom) 같은 교육학자는 그의 ‘완전학습 모형론’에서 유능한 교육자는 ‘둔재를 수재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학에서의 실력 있는 교수와 유능한 교육자의 평가기준은 결국 그의 연구실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면 이번 조사연구의 전체평균에서 나타난 고려대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발견하게 된다.

형식에만 그치고 있는 대학 강의평가제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교수연구실이 많은 대학일수록 우수대학인 것이다. 1970년대 미국의 대학교수 사회에서는 ‘Publish or Perish’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결국 공부하는 교수가 공부하는 학생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공부하는 교수가 공부하는 학생을 만들면서 동시에 공부하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수를 만드는 순환논리도 성립된다고 볼 때 한국의 대학생들의 현주소도 절망적이다.

이른바 세계적 명문대로 알려진 미국의 하버드나 MIT, 스탠퍼드 심지어 중국의 베이징, 칭화대 등의 대학생들은 취미가 공부이며 ‘죽도록 공부하기’가 있고 동시에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사는 교수들이 있기에 가능한 결과이다.

한국적인 특수조건과 현실에서 단순히 선진국의 일부현상과 비교평가 하는 것은 무리인 점도 있으나 21세기 세계화의 추세와 무한경쟁의 여건 하에서는 별수 없이 한국의 대학들도 과거의 인습과는 다른 자세와 각오가 요구되고 있다.

특히 교수라는 직업은 그 성격상 언제나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고 교수하는 위치이기에 남을 평가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익숙해 있지만 타인으로부터의 평가나 비판에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여주기 쉽다. 그러나 자기비판 없이는 결코 자기개선이나 발전이 없다는데 교수들의 공통적이고 생리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 국내의 각 대학들도 강의평가제를 도입하고 있으나 그것이 승진이나 연봉에 반영되지 않고 형식에 그치고 있다. 외국의 유수 대학들은 강의평점의 결과를 책자로 발간하여 교수와 학생들에게 배포한다. 또 그것은 승진과 연봉책정의 주요기준이 되며, 하버드대의 경우는 강의 평가의 결도를 정교수가 되는데 결정적인 조건으로 삼고있다.

한편 한국의 대학사회에는 연구와 교수에 도움은커녕 방해 요인인 행정보직에 연연하는 교수도 많다. 총장직을 맡으려고 몇억 원을 선거비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심지어 학장이나 학과장이 되려고 돈을 쓴다는 지방대학 어느 교수의 이야기는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몰두하는 교수들을 슬프게 만들고 있다. 더구나 가까운 일본에서는 그동안 노벨 문학상을 비롯하여 물리학, 화학상 등의 세계적인 석학이 배출되고 있는 마당에 우리들은 학문적인 열등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학문의 세계는 정치집단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目的志向的일 뿐 地位志向的 성격의 직업은 아니다. 이제 天高馬肥의 계절을 天高學肥로 바꿔 교수와 학생들은 다같이 연구실과 도서관에만 매달려 고려대의 학문적 위상이 국내적으로도 도약하고 국제적으로도 일류대학이 되도록 나 자신부터 매진해야만 되겠다.

김동규 (인문대 교수, 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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