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란 말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창(窓)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지 벌써 반세기나 지났다. 오랜 세월 축적된 인간의 역사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허무적인 시선으로 삶의 부조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의 근대 체험은 근대의 기획이 문명화된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시대를 구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지점이 바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접경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부조리’의 출현이 지니는 역사적 진정성은 그것이 근대의 기획에 대한 반성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데 있다. 사르트르와 까뮈와는 또 다르게 연극에서 독특한 지위를 이룩한 1950년대의 부조리극들이―양식적으로 공통점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마틴 에슬린(Martin Esslin)에 의해서 하나로 묶여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반세기가 흘렀다.

한국 연극계에서도 부조리극은 1969년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된 이후로 지속적으로 무대화되었으며, 많은 작가와 연출가들은 그 철학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부조리극의 기법들을 현대 연극의 자양분으로 흡수하였다. 그러나 좀 냉정하게 말한다면, 무대화된 부조리극으로부터 우리는 출현 당시의 정서적·미적 충격을 경험할 수는 없다. 공간이 다르고 시대가 다른 까닭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부조리극을 때로는 과거 역사의 한 장을 차지했던 유물로, 때로는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을 환기하는 현대적인 무대언어로 받아들이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근대에 대한 미학적 성찰은 이미 희미해지고 그 화두가 단자화된 개인의 몫으로 환원되는 이 같은 수용 양상이 그리 유쾌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현상을 원론적인 입장에서 논박하는 일 역시 부질없어 보인다. 이 국면이 바로 우리들의 정확한 현주소임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부조리극에 대한 이 같은 단상을 떠올리게 된 것은, 올해 상반기에 사무엘 베케트(Beckett, Samuel Barclay)와 장 주네(Genet, Jean)의 작품이 동시에 올라간 기억도 있겠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최근 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가다}를 인용·각색하여 이를 극중극으로 활용한 김재엽 작·연출의 {체크메이트}(극단 「파크」, 2002.8.23∼9.29)를 보고 나서이다. 한때는 잘 나가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마태오가 죽어가는 왕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자신도 죽어간다는 이야기이다.

죽음의 부조리성에 몰두했던 이오네스코처럼 이 연극 역시 죽음이 사실 얼마나 낯선 것인가에 주목한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하면서 정리하는 태도는 이오네스코와 전혀 닮지 않았다. 사실주의적으로 진행되는 본극과 부조리적으로 진행되는 극중극의 공존은, 엄밀히 말해 죽음의 부조리성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주는 이 연극의 형식이다. 현실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가 서로 합치되지 못하는 이원성, 그 갈등을 이 연극은 마태오가 자신에게도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는 순간을 통해 표출한다. 그러나 갈등의 해결은 필요한 법이어서 이 연극은 양 공간이 서로 합일되는 마지막 장면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 해결은 이미 1년 전에 죽은 고나리 혹은 체크요정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체크요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나 홀로 외롭게 한 세상에서 태어나고, 또 홀로 외롭게 그 다음 세계로 떠나요. 자, 이제 당신은 눈을 떴어요. 꿈을 깬 거예요.” 지극히 감상적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설득하는 체크요정, 어쩌면 아직도 우리는 쓸쓸하고 허무하기 그지없는 삶과 죽음의 부조리성의 차가움보다는 따뜻한 친구와 같은 그런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 모른다. {체크메이트}가 부조리극의 문으로 들어가서 계몽시대의 문으로 나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