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드컵의 개막식을 비롯해 큰 규모의 국제행사에는 한국의 전통을 세계에 알린다라는 취지를 담은 공연들이 으레 행해진다. 그러나 그 때 표현되는 전통은 이미 예로부터 전해내려 오는 그대로의 전통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에 의해 상당히 변형된 전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악기로 표현되는 음악을 비롯해 무용수들의 의상, 그들의 몸짓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신체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는 이미 근대적 생활이 낳은 감각과 신체적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상당히 서구화된 감각과 신체로 표현되는 전통이란 이미 순수한 전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표현된 전통이 순수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연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우리들은 그것 또한 전통의 표현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건 의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건 간에 이러한 사례는 현재 표현되는 전통이란 근원적으로 순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7일(월) 와세다 대학에서는 ‘한일문학의 관련양상’이라는 테마로 김윤식 교수의 강연회가 열렸다. 김윤식 교수는 자신의 한국문학사연구가 1940년대 임화에 주창된 이식문학사를 극복해보려는 과정이었다고 술회하면서, 1920년대 일본 프로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 1902∼1979)의 시 『비내리는 시나가와역』(雨の降る品川驛)이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자, 문학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탄생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것을 한일 양국의 문학이 단지 일방적인 이식의 관계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하나의 사례로서 제시하였다. 김윤식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이식문학사를 넘어서려는 과정에서 오히려 한국근대문학의 형성에 미친 일본문학의 적지 않을 영향을 보게되면서 이식문학사를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라는 점도 재확인하게 되었다는 점도 덧붙였다.

최근의 연구동향은 문화을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간의 교차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인식해 가는 분위기이다. 오늘날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문화적 순수성과 배타성에 대한 이러한 학문적 인식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문학사(文學史)라는 제도는 적지 않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한국문학사는 창작 주체를 축으로 구성되어 왔다. 그런 까닭에 한문으로 쓰여진 작품들도 그것이 현대 한국인의 조상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면 한국문학사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한국인이 일본어로 쓴 작품은 아직 한국문학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문학사라는 것이 안고 있는 모순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모순이 드러나는 이유는 문학사라는 것이 이른바 독자적이고 순수한 국민의식의 계보를 형성하려는 내셔널리즘적 욕망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식문학사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반드시 폐쇄적인 한국문학사의 형성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문학사를 이식/주체의 시각에서 보는 한 문학사라는 제도에 감춰진 내셔널리즘의 순수/배타의 인식구조를 극복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문학사에 대한 반성적 인식의 확산과 함께 국문학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일본문학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자국의 문학을 인식해가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자국의 문학을 국민문학 혹은 민족문학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권과의 영향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상대적인 존재로 파악하려는 시각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사정은 문화의 복합성이 식민지 시대 이루어진 문화의 폭력적 이식성을 미화하는 논리가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식민지와 이식이 제공하는 부정적 어감에 사로잡혀 문화의 다양성을 애써 부정하려는 태도는 이제 극복되어야할 단계에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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