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100주년 기념행사를 지켜보면서 고대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느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웅장한 100주년 기념관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말끔하게 새로 조성된 캠퍼스 분위기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인문학의 쇠퇴, 더 나아가 고사 직전이라고 부르는 정신적으로 궁핍한 이 시대에 개교 100주년에 발맞추어 높이 휘날린 고려대학교 철학의 기치를 보고 느꼈다. 대한민국 최고의 경영자에게 “명예철학박사의 자격이 없다”는 글을 읽고 고려대학교 문학박사 학위에 새삼 긍지를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고독한 인간을 연구하고 가장 신나는 인간을 찾았던 지난 연구과정이 정말 자랑스럽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생들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철학이 빠진 경영자는 철학박사가 될 수 없다는 것 같다. 여기서 미국 하바드대학에서 수학한 어느 영문학 교수의 일화가 생각난다. 어느 날 강의가 중단될 정도로 소란해서 알아보니 아프리카에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졸업생이 모교에 거액을 기증했는데 재학생이 거부운동을 하는 시위였다고 한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그 기부금은 아프리카에서 번 돈이 아니라 착취한 돈이라고 재학생은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은 그 기부금을 사양했다고 한다. 그 교수는 착취해서 번 돈을 거부할 줄 아는 미국대학생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고 그 체험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삼성은 우리나라 GDP 20%를 생산하는 거대기업이고 기업운영 시스템은 세계가 주목한다. 노조가 없는데도 근로의욕이 넘치는 기업, 출퇴근의 자유, 사원의 여가를 위한 지원, 기업 총수의 모교가 아닌 대학에 400억 이상을 기부할 수 있는 장학재단을 가진 대기업이다. 한 마디로 삼성은 우리나라 대학생이 선호하는 최고의 기업이고, 삼성 맨은 성공의 대명사이다. 400억 이상의 기부금을 받은 고려대학교가 명예로 보답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어느 신문사설이 말한 대로 “비록 무노조 경영, 편법 상속을 둘러싼 논란의 그늘”이 있고, “국가경제에서 삼성의 비중이 지나치게 비대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고 해도 400억 이상을 기부한 삼성 최고 경영자에게 물리적 정신적 박해를 가하는 것은 비난 받지 않을 수 없다. 어느 경제전문 기자의 질타처럼 일등을 칭찬하는 데 인색하고 공보다는 과를 더 부각시키는 안티 꾼으로 매도당할 수도 있다. 현재 통용되는 우리의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그런 비난을 터무니없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그들을 보자. 새마을 운동, “잘 살아 보세”를 노래 부른 결과는 “돈이면 다 된다”는 통념이 아닌가. 천민자본주의는 이 땅에 너무 깊게 박혀 있어서 그 통념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그런 통념에 대한 저항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들은 철학을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쓰려고 한다. 다른 철학운동을 한다. 그런 이유에서 한국 최고의 경영자 일지라도 인간을 사랑하는 철학이 없는 경영자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 같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은 (학생회는) 모교가 삼성에게 명예를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삼성을 동경할 것이고 거액을 기증한 삼성장학재단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100주년 기념관이나 첨단교육기자재를 보고 두고두고 이건희 회장을 자랑할 것이다.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학위수여를 거부 한 것이 아니다. 단지 철학박사 학위를 거부하는 것 같다. 삼성 식 기업정신을 철학이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조차 인정하지 않는, 다시 말하면 헌법에도 명시된 결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경영철학은 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삼성 식 경영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정신이 빠진 것으로 비쳐졌다고 본다.

    어느 대학이 이런 운동을 했단 말인가! 고려대학교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철학을 외면하면 “돈이면 다 된다”는 천민자본주의 정신을 우리의 가슴에서 쉽게 닦아 낼 수 없다. 국가와 대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한국 최고 경영자에게 물리적 정신적 타격을 준 것에 대한 비난이나 징계에 앞서 그들의 철학에 먼저 귀기우려야 한다. 그럴 때 고려대학교에는 철학이 살아 숨쉬게 될 것이고, 앞으로 인간을 위한 철학에 기초한 학생운동이 전개될 것이며, 재학생뿐만 아니라 졸업생들도 고대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을 더욱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김인수(독어독문학과 70,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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