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하사탕』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많은 평자들이 본 것처럼,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에서 세태를 거치며 망가져 가는 주인공 김영호의 20년(1979년부터 1999년까지)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기’ 기법으로 보여주면서, 한 남자의 일생에 대한 사실주의적 보고서를 제시하고 있는가? 영화 전개로는 도입부이지만 영화 속 이야기들의 시간적 전개로는 마지막이 되는 장면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애애애…”
하고 절규하는 주인공처럼 순수에 대한 회귀의 몸부림을 말하고자 하는가?


나는 『박하사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의 메시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별 것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독히 특별난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결정적 사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끊고 들어오는 사건, 살을 파고들어 뼈조차 잘라버리고 섬뜩 빠져나가는 시퍼렇게 날 선 칼날의 움직임처럼 한 사람의 삶을 베고 들어오는 사건, 『박하사탕』은 그런 지독한 단절의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삶에서 참수(斬首)의 칼날과 같은 것이다. 인생의 목이 망나니의 단 한번 칼질에 잘려 내 뒹구는 경험과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하사탕』은 - 많은 관객들이 속았듯 - 거슬러 올라가기로 배열된 ‘사건들의 연속’으로 되어 있지 않다. 이 영화는 ‘한 사건의 여파들’로 되어 있다(이 점에서 이창동 감독은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전개했어야 하는지 모른다.)
 
결정적 사건 이전으로 복귀 갈망하는 외침

마치 연극의 막(幕) 형식으로 된 에피소드 각각의 내용은 거슬러 올라가기가 아니라 시간의 평범한 흐름으로 설명되고 있다. 관객들은 이 영화 전체가 역(逆)진행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7개의 막 배열이 그런 것이지 각 막을 구성하는 이야기는 시간의 순(順)진행으로 되어 있다. 이는 앞 막의 끝과 다음 막의 처음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 막의 처음과 다음 막의 끝이 연계점을 공유하는 구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소녀의 살인 사건이다. 1980년 사태 때 공포 속에서 ‘고문관’ 졸병이 M-16 소총을 오발하고 총탄은 죄없는 미지의 한 소녀를 살해한다. 그것은 ‘과실치사’로도 처벌받지 못해서 정리되지도 못한(그래서 한 쪽으로 치워놓을 수도 없는) 사건이다. 이 ‘정리되지 못한’ 살인 사건이 주인공의 삶에 참혹한 단절로 개입한 것이다(영화는 매우 치밀하고 어찌 보면 좀 무료한 구성 의도 때문에 이 사건의 의미가 부각되는 것을 억누르고 있지만).

이창동의 연출이 감추면서 보여주든 보여주면서 감추든 간에 『박하사탕』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인생 전체는 어느 순간 삶에 단절로 개입하는 한 사건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이 관점에서 보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서 들리는 유행가 가사 “나 어떻게, 너 갑자기 가버리면”에서 방점은 ‘갑자기’에 찍힌다). 사건 이후의 인생 역정은 그것의 여파가 일으키는 에피소드들일 뿐이다. 마치 사건 당일 밤 유탄에 부상당한 영호의 오른 다리가 때만 되면 발작을 일으켜 통증을 주고 절름거리게 만들 듯, 부상은 그 날 밤 한 번 있었고 후유증은 사건 이후 수시로 지속된다.

영화를 역사적 전개의 순으로 보면, 단절의 사건은 두 번째 막에 있었고 그 이하의 막들은 단절의 영향을 보여주며 나열돼 있는 것이다. 사건 이후 주인공 영호의 삶이 ‘의미 파괴의 의미’만을 지니듯, 나머지 에피소드들은 무의미한 인생의 순간들을 반복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의미를 삭제해 가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반의미의 의미’라는 역설로 표현될 수 있을지 모른다.

영호는 이미 1980년 그 날 밤에 죽었다. 인생의 의미를 총성과 함께 날려보낸 것이다. 영화의 시작이자 이야기의 끝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마주하고 선 영호는 이미 1980년에 죽었던 자신의 죽음을 단호하게 확인할 뿐인 것이다. 곧 인생의 단절을 또 다른 단절로 확실히 도장 찍는 일이다. 그것이 김영호 인생의 종지부이다.

영호의 마지막 절규 “나 다시 돌아갈래!”는 순수로의 회귀를 열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건 이전으로의 복귀’를 갈망한다. 자신의 첫 번째 결정적 죽음 이전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그 첫 번째 죽음은 복수(複數)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 날 밤 죽은 자는 애꿎은 미지의 소녀만이 아니다. 영호는 그 소녀에 이미지로 겹쳐진 애인 순임을 살해했고(1984년 형사가 된 영호는 근무지로 자신을 찾아온 순임을 거부한다. 이미 1980년 소녀를 죽임으로써 순임을 죽였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인생조차 살해했다.
 
인생은 쉽게 박살나는 박하사탕 같은 것

인간이란 참으로 약한 존재다. 인간의 삶 또한 무척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응집력 없는 박하유와 설탕의 입자로 구성된 박하사탕처럼 말이다.
나처럼 이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박하사탕은 순수를 상징하지 않는다. 쉽게 박살나는 인생을 상징한다. 박하사탕을 땅에 떨어트리면 바닥에서 쉽게 박살나고, 투박한 군화가 아닌 그저 구둣발로 밟아도 박하사탕은 박살난다. 박하사탕은 젤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한번 부서진 박하사탕의 조각들을 그 누가 다시 이어 붙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생을 고뇌하며 조심스럽게 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어느 한 순간의 폭력도 인생에 영원히 봉합될 수 없는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애쓰며 사는 진정한 이유는 그런 경우의 수를 줄이기 위함이다. 삶을 단절하는 폭력이 없는 세상, 그것을 위해 우리 삶은 명민한 감시의 CCTV를 켜고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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