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과 상업성은 영원히 결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가. 논리적으로만 따진다면 그러하다.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시대적 감성을 고려한다면 둘다 고객을 위한다는 관점에서는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 단계가 한층 더 복잡해서 최종 목적인 이윤이 기업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자를 고려대학교로 보면 후자는 스타벅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학문 추구라는 대의적 공공성을 따지다보면, 학생들의 기본적인 욕구와 감성을 간과할 수도 있다. 현재 학생들이 공부하는 장소의 성격이나 경향을 보면, 유행에 영합하는 공간적 디자인과 스타일, 그리고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중독성의 문화’다. 마치 스타벅스를 안 가면, 우리는 대학생으로서의 낭만을 느끼지 못하는 낙오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학생들의 편의와 복지 등에만 신경쓰다 보면 투자를 늘려서라도 상업적 공간을 더 확충할수밖에 없는데, 이럴 경우 다시 ‘대학의 존재이유’라는 테마와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쪽을 위해서 다른 쪽을 버리거나 포기하라’는 이분법적 관점을 고수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진정 문제의 본질은 공공성인가 상업성인가가 아니며, 또한 공공성이므로 상업성을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약간 과장되게 말해서 스타벅스를 대학 안에 하나 운영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상업성에 휘둘리고 학문 추구라는 본질을 망각하며, 자본주의의 함정에 빠진다고 보는가. 물론, 필자 또한 대학측에서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지어진 건물에 이러한 상업적인 시설을 입주시키는 것보다는 구조적인 차원에서 열람실 확대나 휴게실 공간의 증대 등의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복리증진적인 차원의 공간 마련에 힘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복지라는 개념의 외연(外延)도 확장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복지는 단순히 공간이나 시설과 관련된 물리적인 개념만은 아니다. 대학으로 보자면, 그것은 결국 내부 고객에 대한 세부적인 관심과 지원이다. 대학과 학생 간의 관계를 규정지음에 있어, 현재의 학생들은 10년전의 필자 또래의 학생들과는 확연히 다른 입장에 처해 있다고 본다. 아니,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그들은 분명히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즉, 대학보다는 본인이 주체여야 한다는 점이 그렇고, 상대적으로 우월한 주체로서 자신의 감성과 감각을 만족시켜주는 곳을 대학으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다. 예전에는 공부 자체가 대학의 가치를 결정짓는 최고의 우선순위였다면, 지금은 패러다임이 바뀌어 공부를 위한 제반 환경과 학생들의 욕망과 욕구를 반영한 트렌드 업데이트 여부가 대학의 가치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공성이냐 상업성이냐 운운하는 것은 일종의 난센스로 보여진다. 스타벅스 문제는 어디까지나 고객 만족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지 거창한 대학 본연의 기능과 역할 차원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공공성이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단정짓는 것도 문제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후자는 전자와 괴리되는 얘기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상호 접목되는 성질의 것이다. 둘다 학생들을 중심축으로 놓고 있고, 최종 수요자가 학생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스타벅스를 폐점하자는 식의 비판적 이야기보다는, 스타벅스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학생들의 학습보조에 보태자는 수익환원 쪽의 이야기가 훨씬 더 설득력 있고 실리적이다. 지금은 무엇이 대학과 학생 둘 다를 위한 윈윈(win-win)적 방향성인지 생각해 봐야 할 때다. 누구를 위한 스타벅스인가.

허병민(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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