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언제부턴가 고대의 봄이 시끄럽습니다.. 작년 이맘 때 쯤에는 대통령도 벌벌 떠는 한 명사를 무안하게 만든 일이 터져 온갖 말이 오가더니, 이번에는 보건대 문제가 학교를 들었다 놨다 하네요. 그 옛날 4.18도 봄에 터진 것을 생각하면, 고대의 봄은 이래저래 조용히 넘어갈 수 없는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건대 통합에 의한 투표권 가부 문제로 많은 말들이 오갑니다. 서로간에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행동과, 시위와, 대자보가 계속해서 나붙고 있습니다. 토론이 됐든, 논쟁이 됐든 이것은 당연한 과정입니다. 내 입장을 상대에게 전달하고 상대가 나의 생각에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니까요.

‘정의’의 ‘정의.’
 그런데 양쪽에서 오가는 말 중에 좀 생각을 하게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보건대 통합에 대한 시위로 일부 단체들의 ‘본관 농성(일단은 이 말을 쓰겠습니다.)’ 가 이슈가 되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단체가 붙인 항의 대자보에는 “고대의 ‘정의’가 죽었다” 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 단체는 사망한 “고대의 ‘정의’ ”를 근조하기 위해 검은 옷을 입고 시위를 하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구요. 그런데 이번엔 주도한 학생들을 징계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이번에는 시위를 주도한 측에서 “징계 시도 철회가 바로 ‘정의’ 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정의인가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황우석 파동 때 한 인터넷 신문 화면 스틸컷과 함께 시사유머 게시판에 나돌았던 멘트입니다. 본관 시위와 그 참여 학생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 중 일부가 “이게 다 운동권 때문이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좀 씁쓸합니다. 아니, 생각까지는 그렇다 치고 자게에 올라오는 글들 중 ‘다 퇴학시켜 버리’라는 등의 말들이 좀 무섭기까지 하네요. 기억하세요. 20세기의 자본주의에 복지라는 개념을 더하여 (그래도) 살아볼 만 한 자본주의를 만든 것은 맑스와 맑시스트들의 실랄한 자본주의 비판이었고, 20세기 말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지금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운동권’ 들의 사회 비판과 참여 정신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어느 입장에 서 있든,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That's the WAY it goes.
 “이것은 폭력이 아니다” 라고 본관 농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학교는 일방적 통보만 했고, 학교는 우리의 요구안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우리의 농성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의 이 농성이 있기까지 일이 진행된 순서가 뒤집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알리고, 설득시키고, 전학대회 등을 통하여 학생들의 공식적인 입장을 명확히 한 후 학교와의 대화 시도가 받아들여 지지 않았을 때, 요구안 전달이 있어야 하고,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을 때 비로소 행해지는 농성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시위가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번 일에는 이 모든 과정이 거꾸로 되어 있거나 생략되어 있네요. 본질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방법’ 이라는 문제는 이 사회에서 아주 중요하지 않을까요. 똑같은 ‘칼’ 이 어떤 ‘방법’으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천자만별의 평가를 받는 것처럼 말이지요.

악법도 법이다.
 유명한 소크라테스(맞나?^-^;)의 일화를 아실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 말에 대한 평가가 예전 우리가 학교 도덕시간에 배우던 그 대로가 아닐 거라는 것도 다들 아실 겁니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이따위 법 지킬 수 없어!” 라며 독약을 내던졌다면?! 이번 일을 보면서 이 소크라테스의 일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다 주는지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독약을 마시는 재판의 결과를 따른 소크라테스의 일화는 한 쪽에는 말이나 행동의 겉껍데기만 보아서는 그 실체를 얼마나 왜곡되게 볼 수 있는지를, 또 다른 한 쪽에는 같은 신념에 대한 다른 방법적 시도가 얼마나 다른 반향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요?

자유가 너희를 정의롭게 하리라.
 이번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말이 오갑니다. 의견이 오갑니다. 주장이 오갑니다. ‘토론문화’ 라는게 바로 이런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좋은 현상 같아요. 이 좋은 토론 문화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바로 ‘네 말은 말이 안 되고 내 말만 맞다.’ 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끝없이 평행선을 달린 토론 프로그램 많이 봤잖아요.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또는 토론을 바라보는 방청객들은 어느 한 쪽의 편향된 시각이나 사고로부터 탈출하여 자유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상대의 존재를 비로소 인정할 수 있고,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으며, 나의 주장을 상대에게 ‘설득’ 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이 아닙니다. 감정적 설득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생각의 자유가 없는 논쟁은 혀에 겨자 짜놓듯 자극적인 말들과 상호 비방이 오가는 싸움이 되는 것이지요. 2만의 젊음이 모여 있는 대학 캠퍼스입니다. 다양한 생각이 존재할 수 있고 이 생각들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으면 좋았겠지만, 일어날 수 밖에 없었고, 또 일어난 일이라면 이 토론이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중에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요. 내 신념을 가지되 너를 존중하는 가운데 최상의 합의점을 찾아 나가는 길. 이것이 정의가 아닐까요.
고대의 정의는 숨쉬고 있습니다.

Epilogue...
 제가 사는 동네에는 이제 개나리 진달래가 완연히 폈는데, 학교 캠퍼스에는 이미 꽃이 핀 지 한참 되었고, 벌써 잎이 돋으며 꽃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확실히 캠퍼스의 봄은 빠르고 아름답습니다. 학교 캠퍼스가 각종 꽃들로 한참 아름다울 때, 각각의 꽃들은 자신의 색깔을 마음껏 뽐내되, 다른 꽃들의 색깔을 자신의 색깔로 제압하지 않습니다. 함께 어울려 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해 내죠. 그렇기에 캠퍼스의 봄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빨리 핀 만큼 빨리 지는 이 꽃이 못다할 캠퍼스의 아름다운 봄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2만의 젊음입니다. 이 2만 색깔의 젊음이 서로 자신의 색을 마음껏 발산하며 다른 젊음의 색깔을 존중할 때 비로소 고대의 캠퍼스가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아직까지 애인 한 번 없어 봄날의 벛꽃이 서러운 한 27살의 03학번 공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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