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지리교육과 교수 서태열의 <지리교육학의 이해>는 분량만 보더라도 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이다. 국내 지리교육론서 중에서 일단 질적 평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저자의 학문적 성실성에 의한 꼼꼼한 자료수집과 정리에 있어서만큼은 최고로 평가되며 현재 여러 대학에서 지리교육론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필자의 이번 지적은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본서의 영향력에 비춰 교육학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고민은 의미있다고 생각되어 조심스레 문제를 제기해보고자 한다.

본서의 '교육에 있어서 공간의 중요성' 단원에서 저자는 볼노프가 <교육의 인간학>에서 “인간은 먼저 공간을 정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하이데거의 공간의 모티프를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다.

그런데 교육학을 다루는 그것도 ‘인간중심’적인 교육학을 다루는 단원에서 하이데거를 인용한 볼노프나 이를 재인용한 서태열이나 하이데거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것(혹은 모른 척?)에 대해서 의구심이 든다.

하이데거의 출세작 <존재와 시간>은 인간 중심적인 철학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핵심화두인 ‘존재/존재자’를 이후 총통과 민족에 투사시켜 지도자 숭배를 드러냈다. 그리고 공간의 모티프를 구한 하이데거의 ‘대지’에 대한 집착은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 “대지의 설명할 수 없는 거절” 등으로 반복, 구사되어 나치의 ‘피와 땅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정치적 함의가 내포하고 있다.

또한 1930년대 이후 그의 철학적 행보는 인간 중심에서 자연과 세계를 중심으로 변환되는데 이로써 그가 열광적으로 추종했던 나치즘의 유대인 학살은 현대과학기술 탓으로 책임이 전가된다. 하이데거와 함께 실존주의 철학의 양대산맥이었던 야스퍼스는 이러한 하이데거를 책임윤리가 결여됐다며 비판했다. 

더불어 전임 총장이 유대인이었다는 이유로 총장직에서 쫓겨난 공석에 나치당원으로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으로 취임한 하이데거는 취임연설에서 “그동안 찬미되어온 ‘학문의 자유’는 대학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우슈비츠나 굴락도 아닌 교육의 장(場)인 대학에서 노골적으로 ‘학문의 자유’조차 부정한 것이다.

지리학의 중요한 화두인 공간에 관한 모티프에 있어서 하이데거의 유용함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가령 서정주의 시적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가 친일파에서 군사독재로 카멜레온적인 변신을 하면서 권력을 찬양하는 시를 썼기 때문에 교과서에 그의 시가 실리는 것이 ‘문제화’되었던 거와 마찬가지로 철학, 미학서적도 아닌 교육학에서 아무런 지적 없이 하이데거와 하이데거를 인용한 볼노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또한 적절치 않다.

볼노프의<교육의 인간학>이 출판된 시점이 1977년, 하이데거가 1976년 죽었다. 전후 그의 나치협력에 관한 논의는 (이광수처럼 죽을 때까지 변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볼노프는 그의 저작을 하이데거에 상당부분을 의지하고 있지만 그의 반인간학적인 면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나치즘을 사유하기 위해서 하이데거의 텍스트를 읽어야한다는 데리다의 요청을 본서에서 기대할 순 없더라도 저자는 최소한 볼노프처럼 하이데거에 관한 논란은 외면하고 공간에 관한 모티프만을 취하기보다 ‘기울기의 기울기’측면에서 하이데거의 반인간학, 반교육학적인 측면을 ‘각주’로나마 지적했어야 했다.      

본서<지리교육학의 이해>가 워낙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저자가 의도적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외면했다기보다는 미처 세심히 살펴보지 못했을 거라 본다.(볼노프를 다룬 부분은 두 쪽에 불과하다.) 본서가 더 좋은 지리‘교육론’서로 거듭나기 위해서 필자의 문제제기가 추후 개정판에 반영된다면 의미 있으리라.
황진태/<대자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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