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노동자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룰라(Louis Inacio Lula da Silva)의 승리로 우남뿐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지식인 사회는 크게 고무된 분위기다. 이 지역은 한 때 모든 사회 이론의 실험장이라고도 불리었고, 그런 만큼 독자적인 이론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이론의 공백기라고 한탄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는데, 이번 브라질 노동자당이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좌파이론에 대한 논의의 활성화를 기대하는 눈치이다.

하지만 멕시코 전체 인구의 50퍼센트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는 우남대학의 정체성은 불투명하다. 끝없는 민영화의 망령에 시달리며 조 단위의 예산을 축내고 있다는 이중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사회 차원에서의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아 왔던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이제 트러블 메이커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와 같은 공채의 형식은 아니지만, 신입 사원을 뽑을 때 담당 부서의 내부 문건에는 ‘우남 출신이 아닐 것’이라는 단서가 있다는 말도 들린다. ‘권리 옹호 운운’하며 문제 제기가 심하다는 것이다. 이 평가절하의 밑바탕에 대학 출신의 인력을 기능화하고 상품화하는 논리가 있음은 물론이다.

어제오늘 시작된 얘기는 아니다. 1982년의 외환 위기로 IMF의 정책 권고(?)를 받아들이고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한 당시의 데 라 마드리드(De la Madrid)정부 때부터 전통적으로 절대 다수였던 우남 출신의 관료들은 점차 사립대학 출신과 유학파로 대체되었고 설상가상으로 90년대 초반과 후반의 기나긴 학생 파업을 겪으면서 이 거대한 국립대학은 국가와 사회의 인정과 옹호로부터 멀어진다. 또한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 곳곳에서 미국과 유럽 출신의 유학파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
 
세계적으로 대학, 그 중에서도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가 치르고 있는 홍역은 비슷하겠으나, 우남에서 느낀 이쪽 동네의 특수한 문제점도 적지 않다. 물론, 이 비판적 사고 속에는 외부의 압력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담당해야 할 패러다임의 변화를 지식인 사회가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 반성의 의미도 들어 있다.

만만치 않은 나이에(학교 동기들이 들으면 무척 비웃을 것 같다. 박사과정인 동기들 중 가장 많은 연령대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다.) 학교에, 그것도 어느 사회에서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넘쳐나는 사회과학 분야에 적을 두고 있으니 어떻게 학문과 생계를 연관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작은 문제가 아닌데, 신기하게도 스물 댓 명의 입학 동기들 중 전업 학생은 몇몇 외국인들뿐이다. 입신양명을 보장하는 직업들은 아니지만 큰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 듯하다. 대다수가 전임 교수이거나 연구자인 동기들을 포함하여 학생 아닌 교수들도 학내의 민주주의나 학생들의 학업 환경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제도가 일단 갖추어지는 것도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커다란 조건 중의 하나라 할 수 있겠지만, 멕시코가 어떤 곳인가. 제도혁명당(혁명을 제도화하다니!)이 70여 년을 집권하며 제도의 근간을 만들어 놓은 나라이다. 노동법을 비롯한 법제와 제도는 선진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지켜지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 우남의 내부 질서는 제도혁명당의 축소판이다. 보란 듯이 후보를 내고 선거를 한 다음에도 결국 커다란 연구소나 단과대의 책임자는 총장이 임명하기 일쑤이고 학문적으로 진보적인 교수들도 조직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우남대학의 노조 또한 강력하다. 혁명 이후 사회 세력들을 혁명에 기반한 제도 안으로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 국가 조합주의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너무 자신들의 이해에만 치중하다 보니 학생들과의 정서적인 연대가 잘 되지 않는다. 20대 후반에서 30대들이 대부분인 시간 강사들 중 1, 2년 동안 월급을 못 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당사자나 이들의 노동에 기대고 있는 교수들이나 노조가 이를 학교의 존립과 연관시켜 생각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면 특이한 일이다. 과거에 제도혁명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남의 근간은 몇몇 ‘공룡들’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서일까.

단과대마다, 연구소마다 있는 수많은 장서들과 좋은 프로그램들의 혜택을(이 학교에는 외국어 학습을 비롯한 무료 프로그램이 많다), 출입증을 발급 받거나 갱신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 각 창구마다 열고 닫는 시간이 다른 것,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5분 후에 점심시간이니 두 세 시간 후에 오라는 등의 관료주의 때문에 마음껏 누릴 수 없을 때,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이전에 대학이 발딛고 서 있었던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도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좌파의 상승을 보며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이 딛고 있는 곳에서의 절차의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는 그것들이 공허한 담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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