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헤~에허이~어허야~ 에헤~에~헤이리~노호~오호야~”
여러 농부들의 노랫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들판 가득 넘실거린다. 이 가락 속에 섞인 ‘헤이리’ 소리는 전국의 많은 농요 중 오직 파주시 금산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독특한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 소리를 딴 마을 ‘헤이리’에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지난 1997년, 문학 미술 영화 건축 음악 등 각종 분야의 예술인들이 모여 ‘예술마을’을 만들자는데 뜻을 모았다. 회원 중 일부로 구성된 자격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영화감독 강제규, 가수 윤도현 등 370여 명의 회원들이 뽑혔다. 건물도 각 예술인과 어우러지게 짓되 페인트를 쓰지 않고 3층 이하로만 한다는 원칙을 정해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렸다. 또한 대중을 위해 모든 건축물의 60%는 창작과 문화 향유 장소로 개방해야 하는 의무 조항을 넣었다. 뜻이 모여진 지 10년, 헤이리에는 각종 전시회, 공연이 활발하다.
저런 집에는 어떤 예술가가 살고 있을까? 궁금증에 열려 있는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헤이리 마을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① 금산갤러리 - "하늘까지 솟아라" 매년 자라나는 살아있는 건물  ② 황인용 카메라타 음악감상실 운영자 - 그는 "고향에 아날로그의 추억을 담아두고 싶었죠"라고 말한다  ③ 포슬린 하우스 - 알록달록 세상을 담아놓은 그대의 이름은 포슬린 페인팅!  ④ 서울 액션스쿨 - 거침없는 액션! 예비 스턴트맨들의 훈련소, 마셜아트센터  ⑤ 공영석 공사진 스튜디오장 - 자신만의 사진을 자연 속에서 펼쳐가는 공 씨에게서 여유가 느껴진다

# 시간따라 추억따라, 카메라타 음악 감상실
카메라타는 16세기 말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 모임으로 훗날 오페라를 탄생시켰다. 그래서일까, 안으로 들어서자 웅장한 음악과 함께 공연장에 들어선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 펼쳐졌다. 하지만 찾아온 이를 압도하지 않고 감싸 안는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재즈, 고전음악, 팝송 등을 들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고전 음악이 주를 이루는데 이는 감상실 운영자인 황인용 씨의 취향이기도 하다. 7,80년대 라디오 팝송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의 DJ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의 매력에 빠졌다. 그 때 수집한 1930년대 오디오 기기와 1만여 장이 넘는 LP판들은 지금의 감상실을 만든 바탕이 됐다. 황 씨는 “그 시대 그 음악을 당시의 음질로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라며 “일상생활에서는 듣기 힘든 음악과 이 공간에서만 누릴 수 있는 고요함을 느끼고 쉬어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넓은 공간 속 테이블 마다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뿐만 아니라 휴식을 찾아 온 중년의 모습도 보였다. 제공되는 음료와 머핀을 먹으며 소박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 틈으로 또 다시 바뀐 음악의 1악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 열정으로 달아오른 세상-마샬 아트 센터, 서울 액션 스쿨
5년 전, ‘네 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소매치기로 살아왔던 주인공 고복수가 갑작스런 뇌종양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 그는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 동안 삶다운 삶을 살기 위해 환자임을 비밀로 하고 스턴트에 뛰어든다. 어느 날, 복수는 무술 감독이 이미 자신이 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 놀라 되물었다.
“근데, 왜 나 안 말려, 양 감독님은?”
“이 일이 니 인생의 와이어래. 니 인생의 생명줄. 그래서 말리면 죽는대.”
죽음마저도 넘어선 열정이 가득했던 액션스쿨의 장면이 아직도 선하다. 서울액션스쿨이 헤이리에 둥지를 튼 지 1년 남짓, 약 50여명의 스턴트맨들이 열정을 쏟고 있다.
저마다 연습에 열중하던 그들에게 처음 스턴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다양한 사연들이 쏟아진다. 노남석 씨는 인터넷에 ‘스턴트’ 세 자를 친 후 액션스쿨을 찾아 대구에서 무작정 상경했다. 한편 연습생인 이젤라 씨는 다양한 직업의 경력자. 하지만 오래하지 못하다가 영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액션스쿨을 찾아와 스턴트를 시작하게 됐단다. B-boy활동을 하다가 들어온 스턴트맨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1년마다 뽑는 한 기수에서 일주일 만에 절반씩 우르르 떨어져나갈 만큼 일과는 벅차다. “아침 9시에 와서 청소하고 마을 한 바퀴를 뛰고, 5시까지 기본 발차기도 하고 체조, 검도, 액션연습 등을 하죠”라는 연습생 이젤라 씨의 담담한 대답. 괜찮냐는 물음에 몸이 힘들수록 더 즐겁다고 답한다.
현역 스턴트맨으로 활동하는 노남석, 이철우, 이기완 씨는 짝패, 황진이 등 여러 작품에서 액션 연기를 했다. 철우 씨는 황진이에서 불 몽둥이로 때리는 장면에서 등에 불이 붙어 소화기로 껐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소 위험한 이야기 같다고 하자 씨익 웃으며, “위험도 즐기는 거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철우 씨는 “싫어질 때 까지 할 겁니다”라고 말한다. “지금은 어때요?”라고 “지금은 조금 좋아해요”라고 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나아가 홍콩, 할리우드 액션에 맞서 창의력 있는 한국 액션을 해 나갈 겁니다”라고 당당하게 포부를 밝히는 기완 씨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위험을 감수하고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사람들, 그들의 뜨거운 열기와 포부가 헤이리를 한층 후끈하게 하고 있었다.

# 빨주노초 그릇마다 온 색 가득, 포슬린 하우스
원목의 직육면체가 공중에 떠있는 모습을 한 포슬린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 접시에서부터 쿠키 그릇, 메모 패드 등에 그려진 색색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늬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이것들은 포슬린 페인팅 작품들이다. 포슬린은 자기(瓷器)를 일컫는 말로,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포슬린 페인팅이다. 2층으로 올라서자 꽤나 긴 탁자에 그림 디자인부터 색까지 심상치 않은 작품들이 한 가득이다. 황경희 작가는 “직접 그린 작품도 있지만 매주 열리는 페인팅 강좌를 들으러 오는 학생들이 만든 작품도 많다”며 웃음 짓는다. 처음에는 자연 속에서 작업한다는 게 좋았지만 요즘 들어 사람에 대한 매력을 부쩍 느낀다는 그녀. “사람들이 나만의 공간을 찾아주고, 이웃 예술인들과 친해지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몰라요”라며 말하는 표정 속으로 생활에 대한 행복이 묻어난다.

# 찰칵, 사진 속에 핀 웃음꽃, 공사진 스튜디오와 라임트리
헤이리 안에는 음식점이나 편의시설을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상업화를 방지하기 위해 마을 자체에서 규제하기 때문이다. 대신 몇몇 곳에서 회원들이 직접 작은 카페나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스튜디오의 작은 한 공간을 내어 꾸민 라임트리에서는 맛있는 샌드위치와 차 한 잔을 맛볼 수 있다.
한결 산뜻한 기분으로 라임트리를 나와 마당에서 사진작가 공영석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충무로에서 광고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25년간 사진을 찍었던 그가 헤이리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충무로에서는 기획된 연출사진을 많이 찍어봤는데 스스로 기획해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죠.” 그는 2년 전에 작은 창을 통해 야생을 엿볼 수 있는 설치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사진 강의를 하면서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헤이리 곳곳에 망초, 들국화 등 순수한 자연이 가득해 셔터를 자꾸 누르게 만든다는 그의 말에 그제야 휑해보이던, 곳곳에 숨어있던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앞으로도 지금껏 못해본 나만의 사진으로 전시를 계속 할 생각”이라고 말하는 공 작가의 하얀 머리, 탁자 위 낡은 카메라에도 햇빛이 스며든다. 마치 새롭게 시작하는 그만의 예술과 교육의 열정을 포근하게 감싸 안듯이.

# 세상에서 하나 뿐인 공연, UV하우스
UV하우스를 만든 김정희 연출가는 마당극, 축제 등을 연출하면서 다양한 장르 간 크로스오버를 통해 문화적 발전을 모색해왔다. 이에 그녀는 ‘문화적 네트워크’가 이뤄지는 마을 헤이리에서 ‘서로 소외시키지 않고 동등한 자격으로 역할을 분담하는 형태의 공연’을 기획 중이다. 그녀는 “실험적인 국내외 퍼포먼스 및 크로스오버 작품을 올리면서 검증이 아닌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닦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적대는 대학로 거리에나 있을 법한 소극장이 한적한 헤이리에서 운영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김 씨는 “막 들어와서는 좋았고 중간에는 죽을 만큼 후회했지만 지금은 차분해졌다”고 말한다. 수익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만든 이유를 그녀는 ‘실현’이라고 말한다. 헤이리의 공간은 자기 맘대로 짓는 전원주택이 아니라 개인들의 소망이 집약된, 그리고 실현될 공간들이라는 것. “나름의 예술적 가능성을 발견했고, 좀 더 한걸음씩 적극적으로 가능성을 실현시켜 가면 수익은 따라올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에 이 마을에 언젠가 꿈틀거리는 예술적 열망을 폭발시키는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헤이리를 나오는 길에, 한 팻말에 쓰인 “가장 위대한 예술은 자연이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건물은 지어지는 중이고 인위 조경을 최대한 배제해 처음엔 황량함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헤이리는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발걸음에 설레는 기대가 가득하다.
/문화부

<헤이리로 가는 길>
헤이리 8번 또는 9번 게이트 근처에 위치한 커뮤니티 하우스에서 자세한 헤이리 전체 약도와 건물 안내도를 받을 수 있다.
△좌석버스 200번 : 파주시 맥금동-영어마을-헤이리-파주출판단지-대화역-백석역-합정역
△마을버스 1-2번, 1-3번 : 금촌역-파주경찰서-파주시 맥금동-영어마을-헤이리-파주경찰서-금촌역
△시내버스 900번
※ 헤이리 아트 벨리의 입장료는 무료, 각 건물마다 소정의 문화비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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