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승객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아주 질 좋은 우산을 가지고 왔습니다. 요게 살이 16개로 돼 있어서 아주 튼튼합니다. 디자인도 아주 멋있게 나왔습니다. 오늘 제가 들고 나온 이 우산을 단돈 오천원, 단돈 오천원에 모십니다.”

▲ 지하철 1호선에서 지하철 행상이 속칭 UFO팽이(발광하는 팽이)를 팔기위해 호객행위를 하고있다.
<사진=신수영 기자>

갑자기 비가 내렸던 지난 21일(수) 지하철 1호선의 한산한 객차 안에서 큰 목소리로 우산을 팔고 있던 50대 후반의 김우석씨(남, 가명)를 만났다. 그는 우산이 매우 튼튼하고 품질이 좋다는 것을 강조하며 우산을 세게 접었다 폈다했다.

김 씨는 아침 9시 동대문구에 위치한 ㅁ유통회사에 출근한다. 사무실에는 ㅁ유통회사 소속 직원 10여명이 모여 그 날 하루의 장사를 준비하고 있다. 오전 10시, 김 씨도 그 날 판매할 물품종류를 선택하고 물건을 박스에 담아 지하철로 향한다. 김 씨의 활동구역은 지하철 1호선 동묘앞역에서 서울역까지다. 정해진 구역 안에서 지하철을 계속 바꿔 타며 장사를 한다. 김 씨는 보통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영업을 한다. 사람이 너무 붐벼 객실간 이동이 힘든 출퇴근시간을 피하기 위해서다. 영업이 끝나면 김 씨는 다시 동대문에 위치한 ㅁ유통회사에 들려 사무실에 업무보고를 하고 남은 물품과 박스를 반납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감한다. 그는 “다니던 회사에서 실직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며 기아바이라는 직업에 대해 “곡갱이만 안 들었지 완전 중노동”이라고 말했다.

‘기아바이’라는 말은 지하철 행상을 일컫는 은어다. 과거 지하철 행상은 주로 개인적으로 활동했다. 일자리를 잃거나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하철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지하철 행상들은 주로 유통업체에 소속돼 조직적으로 활동한다. 서울시 전역에서 활동하는 지하철 행상은 300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보통 ‘ㅇㅇ유통’의 간판을 단 유통업체가 직원을 모집해 영업을 펼친다. 이런 유통업체는 주로 동대문 · 제기동 · 신설동 등에 위치해 있다. 업계에 따르면 20~30개의 유통업체가 영업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유통업체들은 인터넷이나 생활지 구인광고를 통해 직원을 모집한다. 김 씨는 “처음 유통업체에 등록하면 일주일 정도는 활동 중인 지하철 행상들을 따라다니며 교육 받는다”고 설명했다.

유통업체들은 지하철 행상의 영업을 조직적으로 관리한다. 유통업체에 소속된 지하철 행상들은 사무실에서 정해준 자신만의 영업 구역을 가지고 있다. ㅁ유통회사대표는 “영업 구역을 정하지 않으면 지하철 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영업할 수 있다”며 “아무래도 이럴 경우 시민이 싫어하고 장사도 덜 되기 때문에 구역을 나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유통업체간 구역에 대해 합의가 돼 있는 것은 아니다. 김 씨는 “다른 업체의 지하철 행상이 지하철에 타 있으면 몇 분씩 기다렸다 다음 지하철을 타기도 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 수는 적지만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지하철 행상도 있다. 이들은 주로 동대문 등에서 직접 물건을 구입해 판다. 지하철 1호선 동묘앞역에서 만난 30대 후반의 지하철 행상 박미혜씨(여, 가명)는 “집안 살림이 어려워 이 일을 시작했다”며 “남편과 아이들 몰래 오후시간에 잠깐 나와 2시간 정도 장사를 한다”고 말했다. 기술도 돈도 없는 상황에서 이 일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이어 “개인적으로 행상 영업을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며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가아바이들의 눈치를 보며 영업한다”고 말했다.

지하철 행상이 판매하는 물건은 발광하는 팽이 등의 장난감류, 명함꽂이, 건전지, 벨트, 수첩, 우산, 비옷, 이어폰, 음악CD, 문구류 등 다양하다. 물건은 매일매일 바뀐다.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아이템이 바뀌는 것이다. 지하철 행상은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그날 판매할 물건을 정한다. 김 씨는 “이 업계 자체가 유행에 민감하다”며 “장사가 잘된다고 입소문난 물건을 주로 갖고온다”고 말했다.

지하철 행상들은 물건을 팔 때 주로 ‘유명 백화점에 납품하는 물건’, ‘전량 일본에 수출하는 물건’ 등의 수식어를 사용하지만 이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지하철 행상이 판매하는 물건은 대부분 값싼 중국산이다. 유통업체는 지하철 행상이 판매할 물건을 저가에 대량으로 사들인다. 지하철 행상에게 산 물건은 하자가 있을 경우 교환이나 환불이 어렵다. 품질 보증이 불가능한 제품인데다 유통업체의 연락처를 알 수도 없다. 본인의 의사에 의해 구매한 경우 현실적으로 보상이 어렵다.

판매하는 물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물건의 원가는 판매가의 50% 선이다. 유통업체가 수수료로 10%를 차지하고, 지하철 행상은 나머지 40% 정도의 마진을 갖는다. 지하철 행상들은 판매실적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 평균 3~4만원 정도를 번다. ㅁ유통회사대표는 “지하철 행상의 영업 실적에 따라 수익은 천차만별”이라며 “하루에 10만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3년 째 이 일을 하는 김 씨는 지하철 객실 안에서 하루 꼬박 6시간 이상 일한다. 그는 “하루 동안 뼈 빠지게 일해 겨우 3~4만원 벌어도 단속 한번 걸려 3만원짜리 딱지를 떼이면 그날은 공치는 것”이라며 “단속반 눈치 보랴, 사람들 눈치 보랴 이래저래 힘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에도 다 타이밍이 있다며 급히 짐을 꾸려 다시금 지하철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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