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꺼내려고 담뱃갑을 만져봤으나 비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시. 꼬박 일 년에 걸친 형주 함락 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여덟 시간이 지나 있었다…방안 곳곳은 세탁물, 담뱃갑, 맥주병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그것들을 이리저리 치워 잘 자리를 마련한 후에 눈을 붙였다. 해가 더 밝아오기 전에 잠이 들어야 한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오호장군 마초가 맹장 여포와 결전을 벌여 형주성을 함락시키는 장면과 사마의를 골짜기에 몰아넣고 협공으로 전멸시키는 장면이 눈에 아른거린다 …

소설가 김영하 씨의 단편 소설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의 한 장면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온라인 게임 <삼국지> 중독자로 일상생활과 단절된 채 밤낮을 잊고 게임에 몰두한다. 소설 속의 그는 현대인의 게임을 통한 현실도피 사례의 전형이다. 또 한편으로는 현대인에게 디지털 게임이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가 됐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인화 이화여대 디지털 미디어학부 교수는 “인터넷은 밥이나 옷과 같은 생활필수품이 됐다”며 “온라인 게임의 과다 사용은 중독이 아닌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통과 의례 체험에 가깝다”고 말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디지털 기술을 표현수단으로 활용하는 스토리텔링을 말한다. 여기에서 매체환경에 활용되는 디지털 기술은 인터넷방송 · 지상파 DMB · 위성 DMB · 무선 휴대 인터넷 서비스인 와이브로(WiBro) 등의 디지털 미디어를 뜻한다. 이들은 검색 등의 선택적 접근이 가능하고 한 정보에 대한 완벽한 복제를 무한 반복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한 물리적 제약 없이 정보를 쉽게 조작하고 변환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미디어와 사용자, 미디어와 미디어 사이에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또한 문자, 사운드, 영상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정보가 복합돼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용자끼리 상호작용하며 가상현실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 외에 <마시마로>등의 플래시 애니메이션 등이 있다. 

전봉관 카이스트(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디지털이라는 신기술과 스토리텔링이라는 오래된 문화가 결합돼 형성됐다”며 “컴퓨터 게임, 웹 뮤지엄, 모바일 광고에서 나타나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전자공학, 미디어공학, 경영학 등에서도 널리 연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본래 스토리텔링은 사건에 대한 진술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주고받으며 만들어가는 이야기 형식이다. 내용면에서 스토리텔링은 객관적 사실만이 아닌 사건을 겪은 자의 주관적 경험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단순 정보와 구별된다. 형식면에서는 사건과 인물과 배경이라는 구성요소를 가지고,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는 사건의 시간적 연결 사슬에 따라 기술된다. 이는 논증, 설명, 묘사 같은 다른 이야기 양식과 구별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기원전 11세기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문자’가 출현한 뒤 문자 형식으로 기록돼 기록 문학적 성격을 지니게 됐다. 이후 종이나 펜 등의 기록수단이 개발됨에 따라 말의 기억을 위해 개발됐던 다양한 운율법칙 등의 기교는 사라져 갔다. 이어 15세기 중엽에 인쇄매체가 등장하자 스토리텔링은 활자체, 문장부호, 교정기법 등의 기술을 수용했다. 이때 작가가 체험한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고백하는 이야기 가공 기술 또한 등장했다. 시간이 흘러 19세기 말 전신과 영화의 발명을 시작으로 20세기에는 전화, 라디오, 컴퓨터 등을 통한 미디어 혁명이 일어났다.

미디어 혁명과 함께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포스트 모더니즘은 ‘능동적 독서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작은 독자의 능동적인 독서행위에 의해 종결된다고 간주된다. 이것을 현실화시킨 것이 바로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다. 이 교수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기존의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에 컴퓨터 통신기술을 더해 사용자와 창작자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허구적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라며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사용자의 역할이 강화되는 매체 민주성과 서사, 그림, 동영상이 결합되는 매체 통합성을 지닌다”고 말했다.

그러면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영역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크게 2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스토리텔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포메이션(Information) 스토리텔링이다.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에 따르면 엔터테인먼트 스토리텔링은 허구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상업적인 디지털 콘텐츠들을 제작하는 것이다. 디지털 영화, 디지털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디지털 방송, 디지털 음악, 디지털 출판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인포메이션 스토리텔링은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이를 가공, 배치, 편집, 디자인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여기에는 디지털 광고, e-러닝, 디지털 박물관 등이 해당된다. 김탁환 카이스트(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인포메이션 스토리텔링은 기존 작가들이 전혀 관심을 쏟지 못한 분야다”고 말했다.

이러한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하나의 문화운동으로 조직화한 작업은 미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1995년 콜로라도 주에서 열린 ‘제1회 디지털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을 기점으로 운동은 꾸준히 이어져 지난 2003년 6월 12일에 제 6회 대회가 열렸다.

반면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해서는 아직 관련 연구 및 세미나가 적은 편이다. 현재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한국디지털스토리텔링 학회, 이화여대 디지털 미디어학부, 카이스트, 장안대학교 디지털스토리텔링학과 등에서 연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안대학교 문예창작과 신선희 교수는 “디지털 혁명 시대에 탄탄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전문인력을 길러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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