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x년 안암, 치열하고 아름다웠던 시대로

▲ (위에서부터 순서대로)①'범머리대기'는 1985년 석탑대동제의 하이라이트였다 ②1984년,평화시위 보장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향해 돌진하는 경찰의 차량 ③1983년,서창캠퍼스의 호영제에서 학생들이 축제를 즐기는 모습, ④호영제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선술집'. 정장을 입은 교수님들도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니 고모집에서 어제 마신 막걸리 때문에 머리가 띵하고 속이 울렁거린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끓여주신 북어국 덕분에 속을 겨우 달래고 집을 나섰다.

1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 교양관으로 가는 길,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가스 때문에 눈물이 절로난다. 어제 페퍼포그(최루탄발사차량, 우측 사진참고)가 쏴댄 지랄탄(최루탄, 공중에서 지랄하듯이 연기를 뿜는다 해 붙은 별칭) 가루가 아직도 땅바닥에 남아 있어서 그런가보다.

그런데 오늘은 같이 수업을 듣는 박기상 선배가 보이지 않는다. 수강신청 하러 교학과(지금의 학사지원부)에 가다 박 선배만 안 만났으면 이런 지루한 과목은 안 들었어도 될 텐데. 내가 듣고 싶은 과목만 적어서 냈으면 이런 고생을 했을까.

그런데 동기에게 물으니 박기상 선배는 시위 도중 스크럼(여럿이 팔을 바싹끼고 가로로 늘어선 것, 당시 시위는 대부분 스크럼을 짜는 것)에 몰래 끼어들어온 백골단(학내 상주하는 시위진압경찰) 놈들에게 잡혀갔다고 한다. 박기상 선배가 처음 복학했을 땐 짧은 머리와 건장한 체격 때문에 백골단으로 오인받기도 했었는데.

1교시가 끝난 뒤, 어김없이 써클실로 가니 ‘인촌묘소로’란 메모가 보인다. 문과대 뒤편 숲속의 잔디자락에 있는 인촌묘소 앞에서 술판을 벌이며 어제 끝내지 못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차! 과동기와의 약속을 깜빡했다. 길이 좁아 평소엔 잘 다니지 않는 다람쥐길이지만 약속시간에 늦었으니 어쩔 수 없다. 비가 올 때면 물이 넘쳐나는 길이란 말이지. 중도관에 도착하니 사대 앞이라 그런지 우리학교와 어울리지 않게 여학생들도 꽤 보인다.

점심을 먹어야하는데 정문 앞 식당까지는 가기가 귀찮다. 경영대와 학생회관 지하에 식당이 있지만 마땅치 않다.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 그래도 먹어야 산다’는 대자보가 와닿는다. 결국 지나가는 동문선배를 붙잡아 깡통(세모난 양철통 모양의 소형매점, 현재의 호상자리에도 있었다)에 갔다. 옆에서 학생들이 치는 기타소리를 들으며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고, 정문 앞에 있는 석탑다방으로 갔다. 금붕어가 노니는 커다란 어항 옆 자리에 앉아 종업원에게 듣고 싶은 노래를 적어 건넸다.

학회 세미나 후에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 때문에 선배들 몇명과 제기동사거리 쪽에 상월 여인숙으로 향했다. 몇은 금방 잠들었지만, 몇 명은 대자보 문안 때문인지 이야기가 길어진다. 아, 자려고 누웠더니 엉덩이가 다시 아파온다. 학교 화장실에 있는 까끌한 깔깔이(거무튀튀한 색의 재생 두루마리 화장지) 때문에 치질에 걸렸나. ‘깔깔이 한 학기 사용하면 치질 걸리고, 두학기 쓰면 굳은살 박힌다’는 선배들 말이 농담은 아니었나 보다. 내일은 성적표를 받으러 교수님께 가야되는데, 도대체 시험은 언제 본거지?
①당시 본교엔 여학생이 거의 없어 캠퍼스의 여학생들은 늘 많은 관심을 받았다.
②지금의 부드러운 휴지와 달리 뻣뻣했던 재생 두루마리 화장지, '깔깔이'
③90년대 들어와서야 수강신청의 전산화가 이뤄졌다. 그 전에는 수강신청표를 직접 작성했다고.

열정의 땀으로 발전 꿈꾼 서창 캠퍼스
어제는 식목일. 교수님, 교직원 그리고 나를 비롯한 학생들이 모두 모여서 땀 흘리며 나무를 심었다. “비록 지금은 진흙 바닥에 신발을 버려가며 나무 하나 보기 힘든 휑한 캠퍼스에서 수업을 받고 있지만, 후배들에게만은 울창한 숲이 있는 캠퍼스를 만들어 주자”는 사명감에 가득 차 어제는 힘든 줄도 몰랐다. 하지만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에 눈을 뜨는데 여기저기가 쑤셔댔다. 헌신적인 선배들 마음을 후배들이 알려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수업을 들으러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건물이라곤 행정동, 인문관, 기존의 쌀 창고를 개조해 만든 체육과학동 뿐이지만, 차차 좋아지겠지. 하긴, 선배 때는 강의실과 강의실 사이의 벽이 얇아서 맨 뒤에 앉는 학생은 옆 교실 교수님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나.

아침을 걸렀더니 배가 몹시 고파 공강 시간이 되자마자 친구들과 인문관 지하 식당으로 달려갔다. 가장 비싼 장국밥을 친구 녀석이 멋대로 시켰다. 무려 한 그릇에 거금 550원이나 한다. 재방이 엄니(식당에서 가장 학생들에게 후했던 분)가 가난한 주머니 사정을 알고 리필을 해주셨다. 그래도 양심껏 셋이서 딱 5번 리필했다.

밥을 먹고 나와 잠시 쉬러 음악다방(교내의 인문관 지하 식당 옆에 위치)에 들어갔다. 커피 두 잔을 시키고 DJ의 노래를 들으면서 수다를 실컷 떨었다. 토요일 날 집에 가려고 조치원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 티켓(이 때는 셔틀버스 운행에도 돈을 받음)도 샀다.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행정관 2층에 위치)에서 공부하다가 하도 무료해서 친구들을 모았다. 왕성극장(현재는 사라졌으나 이 당시에 우체국 골목에 위치)에 가서 영화나 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농악대 선배한테 붙들려 민요 찾기에 나서야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노는 동아리에 들지 못한 걸 후회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농민의 삶을 이해하며 민요집 발간과 농활 가는데 열심인 선배들을 보면서 느끼는 바도 많다.

어느덧 늦은 밤이 됐다. 학교에 조명등이 없어서 여학생들이 밤에 돌아다니기에 위험해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을 데려다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오늘은 내 차례다. 사실 나도 조금 무섭다. 조치원 고등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드센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지나가는구나.

양명철 기자 bsc05@kunews.ac.kr
공혜미 기자 sonamu@kunew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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