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아난(Kofi Atta Annan) 전 유엔 사무총장은 연설문을 작성할 때 본교 정경대 정치외교학과 최상용 교수 저서를 참고했다. 그가 말하는 평화사상의 사상적 근거가 최 교수의 저서 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민주평화사상과 중용의 정치 연구에 바친 비판적 정치학자 최상용 교수. 그런 그가 이번 학기를 끝으로 지난 35년간 몸담았던 본교 강단을 떠난다. 본지는 최 교수를 만나 그가  본교생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그의 학문관에 대해 들어봤다.

 
"통합력을 갖고 경제성장 이룰 지도자가 필요"
4·19혁명의 한복판에서 정치학적 고민 시작


△어릴 적 교회의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보고 받은 충격이 학문을 시작하게 된 동기라 들었는데

-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어느 날 교회의 십자가 위에 피뢰침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큰 충격이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모습인데 왜 거기에 벼락이 떨어질까, 주위에 물어봐도 시원한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때의 충격이 지금 나의 학문적 관심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십자가와 피뢰침의 관계는 지금 내가 전공으로 하고 있는 서양정치사상사에서 보면 신앙과 이성의 관계하고 볼 수 있다. 학문은 놀라움(wonder)으로부터 나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구가 생각난다.

△정치학자가 된 데에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지난 1960년 정치학자나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해의 4 ․ 19혁명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날 나는 시위대에 참가했다. 당시 대치상황에서 통의동에 위치한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은 걸로 기억한다. 그 때 잠깐 쉬는 사이 가방에 갖고 있던 민중서관 편 영한사전에서 'politics'라는 말을 찾아봤다. 도대체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말의 뿌리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 사전에는 ①정치학 ②정치․ 정책 등으로 나와 있었다. 그때 나는 직감적으로 정치학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돼 정치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20 ~ 30대에는 민족주의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고향인 경주에서 밤에는 공비(共匪)로 불리는 좌익세력을, 낮에는 그들을 잡으러 다니는 군경들을 봤다. 때로는 이들의 싸움으로 유혈이 낭자한 길거리를 걸어 다니기도 했다. 이때부터 나의 뇌리에 박혀버린 절실한 물음이 있었다. 왜 같은 동포끼리 이렇게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 하는가. 그 원인은 무엇이며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러한 나의 문제의식은 20대에 쓴 <미군정과 한국민족주의>로 결실을 봤다. 여기서 해방한국의 목표를 민족의 독립, 통일, 그리고 의회민주주의의 결합에 두고 미군정기 한국의 좌우파 민족주의 운동을 비교분석했다.

△40 ~ 50대에는 연구관심이 평화사상으로 옮겨갔다
-1970년대 이후 평화사상으로 옮겨갔다. 민족주의가 민족이나 국가중심의 사상과 행동이라면 평화는 국가간 그리고 국가내의 구조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민주평화론은 민주주의 국가간에는 전쟁이 없다는, 지난 170년간의 경험적 연구를 토대로 민주주의 체제와 평화의 내적 관련을 분석한 이론이다. 현재 민주평화론은 초강대국인 미국외교정책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민주평화론자들은 그들 주장의 철학적 거점을 칸트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민주평화론을 원칙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그 사상사적 뿌리를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사상의 연장선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은 ‘중용의 정치’가 교수님을 사로잡은 테마가 아닌가
-평화사상을 연구하면서 동서양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중용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동서양에 공통된 중용은 과불급이 없다는 데 특징이 있다. 중용은 중간인 동시에 중심이다. 중간은 양극을 배제한 다양한 공간이며 중심을 잡는 것은 중간에서 상황과 조건을 고려한 사려 깊은 선택이다. 중간은 주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비교적 이해하기 쉬우나, 중심은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 가장 적절한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난도의 예지와 용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는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은 많으나 중심을 지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공자나 맹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동서양의 철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중용을 알고 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토로한다.

△최근에는 ‘meanocracy’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평화와 중용의 체제구상과 관련해 하나의 연쇄개념을 만들었다. 평화와 중용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다. 평화가 중용의 목표라면 중용은 평화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나는 평화와 중용의 정치체제를 표현하기 위하여 중용(mean)에 정치(cracy)를 결합하여 ‘meanocracy’라는 새로운 개념을 쓰기로 했다. 고대 그리스의 합법다수정치체제에서 오늘날 자유 인권 법치를 중심 가치로 하는 ‘democracy’는 고대 그리스, 로마 이래 ‘meanocracy’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네오콘식 이상주의보다 키신저식 현실주의를 강조하는데
-민주주의가 평화에 기여한다는 관점에서는 미국의 민주당이나 공화당, 그리고 네오콘들이나 키신저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네오콘의 경우 일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원리주의적인 경향이 짙다. 원리주의는 선악이분법으로 질주할 개연성이 높다. 이에 비해 현실주의는 언제나 정치적 타협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최근 부시정부의 대북한정책의 변화는 원리주의적인 선택의 한계를 자인한 결과라고 본다. 

▲ (사진-김진석 기자)

△일본의 대중문화가 한국시장에 개방된 지 거의 10년 정도 됐다. 일본 대중문화개방정책결정에 관여한 입장에서 지금의 평가는

- 개인적으로 감개가 무량하다. 당시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경쟁력이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기 때문에 우리국민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반대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때 나는 과감히 찬성의 입장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반대하는 분들을 설득했다. 한때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cultural giver’의 입장이 된 적도 있다. 이를테면 퇴계 사상이 도쿠가와 초기 일본의 최대의 사상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齊)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경우처럼 지금 문화산업에서 일본이 앞서 있다면 배우면 되지 않느냐며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할 것을 요구했었다. 당시로서는 소수의견이었지만 결국 결정됐다. 그때의 결정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한류(韓流)는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야스쿠니참배 및 위안부문제 등을 둘러싸고 일본의 아베정권의 행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야스쿠니는 국가신도(神道)의 성격이 짙으며 일본 역사교과서는 애국심을 강조한다. 또한 방위청이 방위성으로 승격되며 가능한 빨리 현행헌법을 바꾸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움직임의 배후에는 국가주의적 지향이 깔려있다. 대륙의 중국도 대국민족주의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한반도는 이들 대국민족주의 사이에서 샌드위치의 입장에 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선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한미 FTA가 체결됐다
-한미 FTA는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이다. 지난 19세기 말 외부의 압력에 대해서 우리는 위정척사, 개화, 동학 등으로 대응했다. 그런데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개화의 실패에 큰 원인이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 제1의 개방이 실패했다면 IMF, 한미FTA 등은 제 2의 개방의 의미를 지닌다. 문제는 한미 FTA 체결에 따른 손실을 메우기 위한 국민적 통합을 유도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다. 그 선택은 한미 FTA 체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교수님의 마키아벨리 강의는 널리 알려져 있다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학생들에게 정치의 냉혹함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키워주기 위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치란 이상과 현실의 투쟁이란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루소의 <사회계약론>도 추천하고 있다. 또한 인간성에 내재하는 여러 가지 이율배반적 속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훈련을 위해 칸트도 권한다.

△서양 고대, 중세, 근대 정치사상사를 강의하시면서 가장 인상적인 그 시대의 정치가는 누구인가
-우선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를 들고 싶다. 요즈음 나는 2500년 전의 플라톤에서 근대의 토크빌까지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다수의 전제>를 경고한 사상가들의 혜안에 새삼 놀라고 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질을 높인 정치가는 역시 페리클레스였다.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탁월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로마시대의 키케로도 그만의 철학을 가진 탁월한 전략가였다. 한편 14세기에 등장한 삼봉 정도전도 동서양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걸출한 정치가였다. 철학과 권력의지, 그리고 치밀한 제도화의 능력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치가다

△현재 한국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의 자질은 무엇인가
-통합력을 갖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다. 통합력은 무엇보다 이념적으로 관용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문학, 역사, 철학에 대한 기본교양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통합력이 없으면 경제성장이 어렵고 경제력이 없으면 평화비용과 통일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평균적인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

△본교의 정치가 지망생 또는 정치학도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보다 문제의식이 투철해야 한다. 개인이나 국가에 있어 최우선순위 문제가 무엇인지를 자각한 다음, 사색과 독서를 통해 견고한 방법론과 결합시킬 수 있다면 정치학자로서 기본 소양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색과 독서 등 내면적 성찰보다 활동력과 실천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면 일찍부터 정치가, 지도자로서 현장에 들어가기를 권고한다. 멋있는 지도자는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험난한 과정에 몸을 던져 자기를 불사르는 정열과 망망대해를 헤엄쳐 나갈 수 있는 기술과 지혜를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은퇴한 뒤의 계획은
- 우선 올해 3권의 책을 출간해야 한다. <민족주의 평화 그리고 중용>, <정치가 정도전>, 그리고 <중용의 정치사상>이다.

△고대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 전문지식과 인간적 매력을 가진 필수불가결한 인간이 되라고 말하고 싶다. 전문지식은 지금 학생들이 전공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및 소화된 지식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은 문학 역사 철학 예술 등 이른바 부드러운 힘(soft power)의 원천이다. 이러한 매력을 가진 사람은 가정이나 사회나 그리고 국가와 세계 어디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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