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디즘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유목주의로 번역된다. 노마디즘은  이진경 서울 산업대 교수가 지난 2002년 국내에 처음 도입한 개념이다. 그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저술한 <천개의 고원>에 나타난 유목주의를 “어떤 외부적인 체계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탈주하면서 사는 것”으로 번역하며 그것을 노마디즘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노마디즘은 다양한 분야에 적용돼 쓰이고 있다. 휴대폰, 노트북, 무선인터넷 등의 IT기술이 한 사례다. 노마디즘의 이동성이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IT기술의 성격과 부합한다는 IT업계의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노마디즘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 철학자 김재인 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 교수가 들뢰즈의 유목주의 관련 저서들로부터 노마디즘 개념을 이끌어낸 것에 대해 “들뢰즈 철학에서 노마드는 그 존재감이 아주 미미하며, 명확한 개념규정도 되어있지 않은 단어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어떤 책에도 ‘노마디즘(=유목주의)’이라는 개념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는 ‘노마디즘’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들뢰즈+가타리’라는 프리미엄 레이블을 달고서 비싸게 거래된다. 물론 이 개념이 이들의 저술에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 개념의 사용을 막을 이유도 권리도 없다. 개념의 창조는 철학의 핵심 활동이므로.

그렇지만 이 개념을 만든 철학자 이진경 자신도 명확한 개념 규정을 못하는 상태에서, 뭔가 있어 보이는 식으로 유통되는 것은 문제다. 지금으로선 노마디즘이라는 거짓개념을 폭로하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 정신을 따르는 일이라고 본다. 이 태도는 원전 중심주의나 고증학이 아니다. 다만 노마디즘이 들뢰즈와 가타리를 읽으면서 상상해낸 개념인만큼 그 정확한 의미는 이러저러하다고 밝히는 것이 학자 윤리에 걸맞다고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노마디즘의 출처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방대한 ‘유목론(nomadologie)’을 펼치는데, 여기서 ‘유목’ 또는 ‘유목생활’이라는 보통명사가 언급되며 이 말이 불어로 ‘노마디즘’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목한 개념은 ‘유목민(nomade)’ 또는 ‘유목적인 것(nomadique)’이다. 그리고 이에 관련된 철학적 논의가 유목론이다.

유목론이 다루는 주요 문제는 ‘전쟁기계’이며 이와 대립을 이루는 ‘국가’라는 포획장치도 주요 고려 대상으로 삼는다. 유목론은 이미 탐구한 바 있는 ‘원시 사회’와 ‘국가’라는 상반된 두 극점에 대한 논의를 확장하면서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연구의 정점을 이룬다. 여기서 핵심은 기존의 모든 통념, 특히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의 입장을 뒤집고 국가가 역사적으로 후대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석기시대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 없는 사회로 특징지을 수 있는 ‘원시 사회’와 이와 본성상 다른 ‘국가’는 진화론적 단계가 아니라 언제나 공존하는 두 극점이었다는 주장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회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상위의 중앙집중적 권력이 없느냐 있느냐에 따라 ‘원시 사회’와 ‘국가’를 나누며, 원시 사회는 그러한 권력의 발생을 방해하는 내적 기제인 ‘전쟁기계’를 갖는다고 말한다. 바로 이 전쟁기계를 발명한 것이 유목민의 업적이다. 거꾸로 말해 유목민을 통해 전쟁기계가 현실에 발현됐다. 전쟁기계에 대한 논의를 ‘유목론’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유목민은 어떤 존재이고, 유목적인 것이란 무엇이며, 특히 이들의 발명품인 전쟁기계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등을 밝혀야 한다. 또한 전쟁과 관련이 없다는 전쟁기계가 왜 ‘전쟁기계’라는 명칭으로 불리는지, 초월적 중앙집중권력인 국가는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전쟁기계를 전유했는지,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이런 모든 논의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이 더 해명되어야 한다.

실상 최근 일어났던, ‘노마디즘’과 관련한 비생산적 논란은 이런 방대하고 중차대한 연구와 논의를 방기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일차적인 책임은 노마디즘이라는 뜻 모를 개념을 만들어낸 당사자에게 있지만, 이를 확대 · 재생산하는 데 참여한 출판, 언론, 학자, 학도 등도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이제 이를 만회하는 길은 다시 들뢰즈와 가타리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여기에 동의하며 계속 논의를 해 갈지 말지를 결정한 후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유목론 논의가 잘 진행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혼동돼 쓰이는 여러 말들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해당 맥락과 용법을 정확히 갈라야 할 것이고, 사실적 지칭과 철학적 개념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철학이 다루는 것은 일차적으로 권리의 영역이지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의 차원에서 많은 것들은 섞여 있다. 이 혼합 형태를 본성에 따라 다른 것들끼리 분류해야 한다.

유목민의 경우, 현실의 유목민과 개념 차원의 유목민을 구별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실에서 유목민, 이주민, 정주민이 있지만 개념으로 보면 이들 각각에 모두 유목적인 것의 경향성이 다양한 정도로 분포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현실의 유목민도 개념상의 유목민을 지향해야 한다. 이는 마치 ‘현실의 여성도 여성화 되야 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유목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매끈한 공간에서의 분배와 관련된다. 공간은 홈 패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 두 부류로 나뉜다. 전자의 요소들은 특성, 위치, 역할 등이 미리 규정된 채로 할당되는 반면 후자의 요소들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결과에 따라 분배되며 자신의 특성, 위치, 역할 등은 나중에 결정된다. 전자의 예가 장기, 후자의 예가 바둑이며, 다른 예로는 폴리스(polis) 대 노모스(nomos)가 있다. 이 구별들은 결국 정해진 상위의 규범을 따르느냐 아니면 규범을 스스로 만드느냐의 구별과 대응한다.

따라서 유목적인 것은 주어진 조건에서의 창조 활동을 함축하며, 도주선을 만드는 그 창조의 동력이 전쟁기계다.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일정한 조건에서의 창조 일반을 이끈다. 즉 예술, 과학, 철학의 창조를 이끄는 것도 전쟁기계다. 전쟁기계가 전쟁을 목표로 하는 것은 국가기구에 포획되었을 때뿐이다.

국가는 유목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경향성이며, 특히 원시사회와는 반대로 한 사회 전체를 상위에서 통제하는 중앙집중 권력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여기서도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흔히 등장하는 대립쌍이 다시 발견되며, 이 점은 추후의 탐구를 위해 꼭 짚어 둬야 한다.

물질 대 지속, 현실성 대 잠재성, 노예 대 주인, 재현 또는 역사 대 생성, 홈 패임 대 매끈함 등의 대립쌍에 이은 국가 대 유목. 이 대립쌍 양 항의 관계는 비슷한 방식으로 설정돼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대립쌍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