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KBS 홈페이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붉은색 계열의 색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빨강, 주황, 분홍, 살색, 그리고 좀 더 세분화된 주홍, 귤색, 연지색, 꽃분홍, 또…선뜻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에서 복식 및 직물류에 사용된 붉은 색계열의 색이름은 50가지가 넘는다. 이는 다른 색계열에 비해서도 월등히 많은 수다.

형태소의 결합방식에 의해 적색계 색명을 단일색명과 복합색명으로 나눠보면, 우선 단일색명에는 적(赤), 주(朱), 홍(紅)등 10가지가 있다. 복합색명은 다시 색명과 색명의 결합, 사물과 색명의 결합, 형용사적 표현과 색명의 결합으로 나누어진다. 색명과 색명의 결합으로 이뤄진 색명에 주홍(朱紅), 주황(朱黃)이 있고, 사물과 색명의 결합으로 이뤄진 색명에 토홍(土紅), 천홍(?紅) 등 23가지가 있다. 형용사적 표현과 색명의 결합으로 이뤄진 색명에 대홍(大紅), 다홍(多紅) 등 25가지가 있다.

적색계 색명의 종류가 이토록 많은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조선에서 붉은색 계열이 다른 색에 비해 힘이 강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왕조 수백년의 시간동안 색명이 사라지고, 사라진 색명을 대신한 여러 개의 색명이 나타나는 변화를 거쳤다는 것이다.

종류가 50여 가지 이상인 만큼 적색계 색명은 각각의 의미 역할이 어느 정도 구분돼 있었다. 적색계 색명이 갖는 의미 역할의 구분을 신분상징적 측면, 용도적 측면, 사상적 측면으로 나누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복식과 관련된 은유적 표현들에서 신분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는 적색계 색명으로 적(赤), 주(朱), 홍(紅), 비(緋), 자(?)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고대부터 사용되면서 그 의미가 굳어진 단일 한자색명들로서, 신분상징의 의미가 조선에서의 실제 사용자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고 무관한 경우도 있다. 적(赤), 주(朱), 홍(紅)은 왕이나 고위관리의 신분을, 비(緋)는 관리의 신분을 상징한다.

주(朱)는 신분 상징적 측면에서 왕과 관리의 신분을 나타내지만, 조선에서 실제의 용도를 볼 때 왕의 복식에 사용되지 않고 관리나 군인, 하례의 복식에 사용되고 있다. 고대로부터 주(朱)라는 색명이 가졌던 신분상징의 높은 위상이 조선의 실제 사용자들을 볼 때는 다소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적(赤)과 홍(紅)이 계속 높은 위상을 지켜가면서 용도적으로도 범위를 확장시켜 간 것과는 대조적이다. 주(朱)의 위상 하락의 원인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들 수 있다.

하나는 조선에서 주(朱)가 빛깔의 이름보다 채색재료의 이름으로 더 많이 사용됨으로써 본질적으로 점차 복식 및 직물류와 멀어져간 색명이 된 데서 빚어진 결과다. 주(朱)가 빛깔의 이름일 때도 벼슬아치들이 쓰는 모자와 같이 채색되는 품목에 주로 사용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다른 하나는 주(朱)색을 내는 붉은색 모래의 염색성이 그다지 우수하지 못해 질이 낮은 채색재료인 주토(朱土)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상작용이 주(朱)라는 색명의 신분위상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비(緋)는 관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색명이지만, 조선에서 실제로는 왕과 관리, 악공인의 복식에 사용돼 용도가 좀 더 다양한 특성을 지닌다. 이는 조선 초기 왕의 예복색이나 악사의 공복색을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를 상고해 정하면서 당대(唐代), 송대(宋代)의 색명표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적색계 색명의 의미를 용도적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적(赤)은 주로 왕과 왕비의 대례복의 일부인 적색 버선, 적색 가죽신을 비롯해 문무백관 조복에 사용된 색명이다. 주(朱)는 군인의 투구에서, 단(丹)은 기생의 무용복에서 볼 수 있다. 진홍빛을 띠는 강(絳)은 왕의 조복과 악사의 의복에 나타나는 색명이다.

이중 홍(紅)은 사용자와 용도가 매우 광범위해 쓰임에 따라 의미하는 붉음의 색조가 다양하다. 간략히 말해 심홍(深紅), 담홍(淡紅), 토홍(土紅), 천홍(?紅)은 문관의 의례복을, 주홍(朱紅)은 군관의 관복 모자를 대표하는 색명이다. 소홍(小紅), 반홍(半紅)은 사서인의 일상복 안감에, 반홍(磻紅)은 왕족의 일상복 안감에 주로 사용된 색명이다. 선홍(鮮紅)은 조정신하들이 귀하게 여긴 색이다.

용도적 의미를 종합해 볼 때, 모든 신분계층의 남녀에게 모두 사용돼 계층과 성별을 초월하는 용도적 보편성을 보이는 색명은 홍(紅)이며, 그 다음으로 다홍(多紅), 분홍(粉紅)도 보편성이 매우 우수한 색명임을 알 수 있다. 반대로 한정된 용도를 보이는 색명도 있다. 주(朱)는 남자의 군복 모자, 단(丹)은 기녀의 무용복, 훈(?)은 왕족의 의례복, 강(絳)은 왕족 남자 혹은 악공인의 의례복을 대표하는 색명이다. 위에서 설명한 심홍(深紅), 담홍(淡紅), 토홍(土紅), 천홍(?紅) 등의 색 또한 용도가 분명히 한정된 경우다.

또한 적색계 색명에는 음양오행사상 및 유교사상과 관련된 의미가 깃들어 있다. 적(赤)은 음양오행사상과 관련해 ‘양(陽)’과 ‘남방의 불’을 의미하고, 유교사상으로 볼 때 ‘바른 것’으로 표현되는 색명이다. 훈(?)은 음양사상과 관련해 ‘음(陰)’에 해당하는 ‘지(地)’와 ‘여(女)’를 의미하는 색명이다. 주(朱)는 유교사상으로 볼 때 ‘바른 것’과 ‘화려함’으로 표현되며, 강(絳)은 ‘화려함’의 의미를 지닌다. 홍(紅)은 유교사상과 관련해 ‘사악한 것’과 ‘화려·사치’의 대명사로 표현되며, 토홍(土紅)은 사대부의 ‘검소함’을 표상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무심코 봐왔던 사극 속의 붉은색들은 이처럼 그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에 따라 각기 다른 신분, 용도, 사상적 의미를 가졌다. 이러한 우리 고유의 색명의 종류를 찾아내 밝히는 일은 중요하다. 전통색을 발굴해 복원, 분석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전통에 한발자국 다가설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적색계 색명에 대해 밝히는 것은 그 첫걸음이다.

김순영/서울대 강사, 한국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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