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을 한다거나 여성주의를 공부한다는 사람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온다. 현대 여성주의는 ‘여성계’라는 상징에 묶여 새로운 여성운동이라도 사회적으로 관심을 얻지 못한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유정미 교수는 이에 대해 “여성운동이 대중적인 교감을 형성하지 못한 잘못도 있고 신자유주의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들이 자신의 몫을 여성들이 점유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과거 여성주의는 대중과 호흡을 맞추며 항일운동, 민주화운동 등을 함께했다. 개화기부터 현대까지 눈에 띄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여성운동과 여성주의를 짚어본다.

이야기를 시작한 개화기
우리나라 최초 여성운동 단체는 1898년 설립된 찬양회다. 찬양회는 발족문에서 ‘신체 수족 이목이 남녀 간 다름이 없는데 어찌하여 여자는 병신모양으로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남자의 제제를 받는가’라는 설립 취지를 밝혔다. 이들은 여학교 설립을 통해 남녀평등을 이룩하고자 했지만 찬양회는 우리나라 최초 여자 사립학교인 순성학교를 세웠지만 당시 보수 세력의 방해로 여자관립학교는 설립하지 못했다.

대중을 향한 여성의 발언이 긍정적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국채보상운동이었다. 패물을 팔아 운동에 참여한 남일패물폐지부인회, 국채보상탈환회 등의 여성단체가 운동 취지문을 신문에 게재한 것이다.

항일운동부터 민주화운동까지
프랑스에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끈 잔다르크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이란(李蘭)이 있다. 이란은 인천에서 태어나 미시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부터 북만주 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게릴라 투쟁을 했다. 1933년 중국 잡지 영감(玲瞰)은 그녀를 ‘40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항상 붉은 채찍을 손에 들고 검은 말을 타고 다니며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군인을 괴롭히는’ 항일 투쟁의 영웅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항일여성운동의 갈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도 뻗어갔다. 특히 고명자, 허정숙, 주세죽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트로이카로 불리며 민족문제와 여성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해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문제를 해결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이후 1970년대 들어 여성은 ‘공순이’, ‘여자 대학생’, ‘호스티스(직업여성)’ 등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성을 ‘모성’으로 수렴시키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분야의 한 축임을 반증했다. 그러나 그들을 부르는 호칭은 저학력, 저임금 노동력으로 단정하던 사회상을 보여준다. 1981년 태창 메리야스 공장 노조 운동은 노동운동의 불모지였던 전라북도에 유일한 민주노조의 운동이었다. 노조운동을 폭력적으로 제압했던 정치 분위기에 맞서 태창메리야스 공장에 다니던 시골 ‘공순이’들은 단식투쟁까지 해가며 남성노동자에 대한 상대적 차별 대우와 연장근무에 대한 보상금 등을 요구했다.

군부 독재시절의 민주화 운동도 여성운동과 함께 흘러갔다. 유신 말 1980년 만들어진 송백회는 전라남도 지역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만든 민주주의 실현 단체다. 송백회는 민주화투쟁과정에서 구속된 사람들의 옥바라지 활동을 하다 광주 5월 항쟁이 시작되자 시민군의 생활 물품과 자금을 마련하고 화염병, 시체 염, 부상자 치료와 음식 취사 팀 등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곁에서 돕고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광주민중항쟁의 막바지였던 계엄군 진압 과정에서도 조직적 항쟁을 이어간 유일한 여성 단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국가에 불운이 닥쳤을 때 민중과 같은 구호로 활동을 전개하던 여성운동은 점차 ‘사적인 문제’로 덮였던 가정폭력과 성희롱 문제까지 본격적으로 스펙트럼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유정미 교수는 “예전엔 가정폭력은 가정 내의 문제로 여겨져 행정적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1980년 여성의 전화가 설립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1993년 제정된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여성의 전화였다. 1992년 계부의 상습적인 강간에 시달리던 김보은과 김 씨의 남자 친구 김진관이 강도로 위장해 계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여성의 전화는 사건의 전말을 공개해 김보은과 김진관의 구명운동을 진행하면서 금기시됐던 가정 내 성폭력을 사회적으로 공론화 시켰다. 김보은은 고등법원 살인 사건 가해자 판결 최초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93년 서울대 우 모 조교가 신정휴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발한 사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소송이다. 유정미 교수는 “성희롱 피해 보상을 요구한 원고가 사회적으로 조롱을 당하는 분위기였다”며 “성희롱이라는 단어도 굉장히 어색했고 성적 희롱이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관행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신정휴 교수에게 500만원의 벌금이 구형되면서 성희롱도 명백한 범죄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2000년에 결성된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 100인위원회(100인 위원회)는 피해자 이름을 사건 이름으로 활용하던 관행을 거부하고 ‘가해자 실명 공개’ 방식을 주장했다. 이 방식은 당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지만 성인성폭력 사건과 다를 바 없었던 아동성폭력 사건 수사 방식을 변화시켰고 오늘날 강력 성범죄 가해자들의 실명이 공개되는 것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중과의 넓은 교감을 시작한 여성
현대에는 새로운 여성운동들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공정무역, 생활협동조합(생협) 그리고 건강운동 등은 일상생활부터 먼 나라의 교역까지 아우르며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국내 최초 공정무역 시민주식회사는 여성환경연대가 시작한 ‘그루’다. 이들은 제 3세계에서 노동착취를 당하는 노동자의 대부분이 여성인 점을 감안해 공정무역을 통해 직접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루를 운영하고 있는 (주)페어트레이드코리아 이미영 대표이사는 “여성이 빈곤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차별적 노동시장과 생산에 필요한 자본의 투입에 대해 남성보다 접근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며 “공정무역은 여성 노동자, 그의 가족 그리고 지역 공동체 전체로 확산될 것”이라고 공정무역의 의미를 설명했다.

지역 조합원 소모임을 꾸리고 생산자와의 직접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여성이 경제 주체가 되도록 하는 여성단체 생협 또한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여성민우회생협은 사업을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의 생활을 보장하면서 지역 생태계를 보호해 구매자들에게 지속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여성의 건강과 관련된 여성 운동도 있다. 여성의 피부에 직접 닿는 화장품 성분 표시에 대해 설명하고 무리한 다이어트와 성형의 위험성을 알리며 여체(女體) 본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도 한다. 여성민우회의 건강사업은 이에 더해 여체(女體)를 수단으로 하는 생명공학기술 윤리를 감시하고 생애주기별 건강문제를 연구해 건강한 여성의 삶을 응원한다.

유정미 교수는 변화하는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의 이상적인 방향에 대해 “스펙트럼을 차차 늘려 여러 곳에 산재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해야한다”며 “여성 뿐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인 성소수자, 노인, 장애인으로도 정치 영역을 확대해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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